[국내뉴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올리비아 핫세
2005-07-07
내 나이 17살때 만난 ‘줄리엣’ 그 철없는 ‘소녀’ 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인이라니 대뜸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화양연화>의 장만위(장만옥). 그렇다. 어떤 남자도 이소룡을 능가할 수 없듯이, 어떤 여자도 <화양연화>의 장만위를 능가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냇킹콜의 촉촉한 목소리를 타고 흐르던 몸과 목과 얼굴의 선, 몽롱하고 습습한 상해의 골목길을 오가던 장만위의 방심한 표정들, <화양연화>의 장만위는 단연 박주영 급이다. 하지만 장만위는 내게 스크린 속의 연인일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나는 스크린 밖의 그를 만나버렸다.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 시사회가 열렸던 중앙극장에서였다. 여신은 량차오웨이(양조위)와 함께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 뒤 내가 앉은 자리 옆의 통로로 지나쳐 퇴장했고, 그때 여신의 옷깃이 내 팔을 스쳤다. 들어라 사람들아, 장만위와 나는 그런 사이다. 이런 가문의 영광이 어딨냐며 길길이 날뛰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배우는 역시 왕자웨이(왕가위) 같이 눈 밝은 감독의 카메라 속에 있어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자, 이젠 본론을 이야기하자. 1978년 겨울, 나는 ‘허리우드’ 극장과 1.2.3카바레 사이의 콘크리트 마당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기 위해 줄 서 있었다. 지금 내 나이쯤의 아저씨가 혼자 줄 가운데 끼여 있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만 17세였고, 줄리엣 역을 맡았던 올리비아 핫세의 나이는 만 15세였다. <썸머타임 킬러>에 등장한 20대 초반의 아름다운 올리비아도, <나일 살인사건>의 조연 올리비아도 나는 모른다. <마더 데레사>로 나온 50대 올리비아의 원숙함은 더더욱 모른다. 내게 올리비아 핫세는 1978년 겨울의 줄리엣으로만 살아 있다.

그러고 보니, 스크린 속의 연인은 올리비아가 아니라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철부지 줄리엣이라 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캐퓰릿가의 무도회에서 두 철부지, 로미오와 줄리엣이 눈이 맞았다. 유머레스크가 끝나고 니노 로타의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총각이 뭐냐. 앞뒤 모르는 불같은 것들이다. 처녀는 뭐냐. 얼음 같은 욕망덩어리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이 사위고 시들어 버린다. 그런데도 사랑에 빠지는 철부지들이 있다. 그래, 다 안다. 그래도 도리 없는 게 사랑 아니냐. 대충 그런 내용의 노래다. 그 아름다운 선율을, 또 그 선율이 이끄는 대로 서로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저 철없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해 겨울 나는 그 영화를 네 번 넘게 보았던 듯싶다. 물론 비디오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서영채/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

내친 김에 하나 더 고백해두자. 줄리엣보다 2년 전에 만난 사랑이 있었다. <진짜 진짜 잊지 마>에서 이덕화와 함께 나온 임예진이 그 주인공이다. 중년의 푼수 역할을 넙죽넙죽 해대는 옛사랑의 모습을 가끔씩 텔레비전 화면에서 마주치곤 한다. 보려고 해서 본 것은 아니지만, 보다 보니 또 그냥 볼만하다.

<마더 데레사>에 나온 늙은 올리비아는 어떤 모습일까. 꽃도 사랑도 젊음도 덧없이 사위어가는 것임을 이젠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아름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서히 내 안에서 역사가 되어가는 사랑이 있다. 조용히 그냥 두어야 할지, 아니면 찾아가서라도 한번쯤 확인해볼지, 어떤 게 나은지 잘 모르겠다. 누구, 알면 좀 가르쳐 주시라.

서영채/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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