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내속엔 내가 너무도 뻔해. 당신이 쉴곳 없네, <쓰리킹즈>
2000-02-29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쓰리킹즈>가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웅담인 이유, 또는 그렇지 않은 이유

할리우드는 그들 나름대로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있고, 우리 관객 역시 그들의 영화를 보는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틀에 고정돼어 있고 종종은 틀만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인디아나 존스>를 보자. 이 영화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오리엔탈리즘과 키플링식 제국주의가 결합된 작품으로 이 영화를 비평하기 위해 그렇게 머리를 쓸 필요는 없다. 눈에 빤히 보이니까. 할리우드 사람들은 그들 습관대로 영화를 만든 셈이고, 우리는 우리 습관대로 받아친 셈이다. 중학생도 짤 수 있는 간단한 알고리듬(연산법) 안에 영화를 넣기만 하면 이와 비슷한 비평들은 동전처럼 좌르르 쏟아진다. <인디아나 존스>는 단순한 영화이기 때문에 이런 습관이 쉽게 먹힌다. 습관대로 받아쳤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다. 그 습관은 비교적 정확하게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를 읽어낸다. 하지만 아무리 할리우드라고 해도 그것보다 복잡한 영화들은 있을 것이다.

영웅적 미국인, 병풍 같은 오리엔탈리즘

<쓰리 킹즈>는 시작부터 하나의 틀에 떨어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 영화의 스토리와 설정은 전형적인 키플링식 모험담이다. 네명의 미국인 보물 사냥꾼들이 후세인의 금을 찾아 원주민들 사이에서 온갖 모험을 벌이다가 결국 금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니까.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 정말 뻔하다.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모두 다음과 같은 틀에 빠질 각오를 해야 한다.

(1) 영화는 외국 관객, 특히 제3세계 사람들의 신경을 박박 긁을 것이다. 보나마나 원주민들은 미국인 영웅들의 도움에 전 생명을 의지하는 무능한 순둥이들이거나 바보 같은 악당 등 고정된 스테레오 타입에 빠질 것이다. 각자 캐릭터의 가치가 미국인 영웅들과 어떤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정해질 것임은 분명하고….

(2) 영화의 이국적 배경은 철저하게 미국인 영웅들의 모험 배경으로 활용될 것이다. 문화적 개성은 오리엔탈리즘의 필터를 통해 흘러나와 아마 배경음악 정도쯤으로 활용될 것이다. 남자 주인공들은 원주민 여자들과 연애를 할 수도 있는데, 물론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뒤섞여 결합한 결과 이야기는 상당히 추해지게 마련이다.

(3) 영화는 철저히 미국 중심적이 될 것이다. 아무리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나와도 주인공들은 미국인들일 거고….

이런 식으로 한없이 나가게 된다.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한 모든 걸 알아버린다. 그리고 그건 정말 사실이기도 하다. 아무리 영화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려고 발버둥쳐도 틀은 그와 별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마련이니까.

<쓰리 킹즈>는 예외일까? 그럴 리가. 한치의 예외도 없이 모두 걸려 넘어진다. 덜떨어진 후세인의 부하들, 엄마의 죽음 앞에 눈물을 글썽이는 원주민 소녀, 미군에게 다닥다닥 붙어 배급품을 구걸하는 사람들… 원주민 여자와의 연애는 없지만 아마 회교권 국가라는 배경 때문에 어쩔 수 없었으리라.

우리는 당연히 이런 장면들에 열받는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왔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런 식의 스테레오 타입과 오리엔탈리즘에 상대적으로 둔감할 수밖에 없는 미국 관객보다는 더 좋은 눈을 가졌다.

그러나 틀은 틀일 뿐 영화 자체가 아니고, 습관은 습관일 뿐 사고가 아니다. 모든 영화가 장르대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영화가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습관 역시 떠나야 한다.

키플링식 모험담? 가능성의 배반

<쓰리 킹즈>를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차적인 요인은 감독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O. 러셀이 ‘정치적으로 공정’해지려고 노력하는 백인 자유주의자라는 것이다. 그의 의도는 분명히 키플링식 제국주의와 정반대되는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이런 키플링식 이야기를 영화의 틀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러셀이 이 틀을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가져다놓았다는 증거가 드러난다. <쓰리 킹즈>의 코미디와 드라마들은 모두 장르가 부여한 틀 안에서 관객이 가지고 있는 기대감을 깨뜨리고 배반하면서 만들어진다. 러셀이 만들려고 한 영화는 장르물이 아니라 장르물인 척 하는 영화이다.

수많은 예들이 발견된다. 우리의 주인공들이 민간인들을 구출해주자 아미르 압둘라는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미군의 공습 때문에 자기가 지금까지 공들인 카페가 날아갔다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한참 경쾌하게 분위기를 잡다가 마침내 닥친 총격전은 공포심과 혼란, 육체적 고통으로 가득 찬 어설픈 사고다.

그중 가장 뚜렷한 예는 사이드 대위다. 영화 초반에서 그는 전형적인 원주민 소악당으로 등장한다. 그는 악센트가 강한 영어를 버벅거리면서 주인공 뒤를 졸졸 따라다니지만 나중에 자기 패거리들이 들어오자 안면을 싹 바꾸더니 고문관으로 변신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이다. 그런데 정작 고문 장면에 들어서면 그는 전혀 새로운 인물로 변신한다. 그의 “마이클 잭슨” 연설은 비교적 전형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그가 폭격으로 다리를 잃은 아내와 죽은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부터 분위기는 수상쩍어진다. 러셀은 그냥 그에게 그 비참한 경험담을 이야기해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그 장면을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그것만으로 모자랄까봐 관객이 좀더 감정이입이 쉽게 될 트로이의 아내와 아기가 가상의 폭격에 희생되는 장면을 보여주며 이 둘을 동격으로 놓는다. 러셀은 사이드를 트로이와 같은 평범한 한명의 남자로 보라고 관객에게 고함치면서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러셀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 사이드는 여기서부터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난다. 그는 트로이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며 트로이보다 훨씬 더 동정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트로이의 “우린 모두 아버지니까”라는 변명 역시 상대적으로 허약하게 배치되어 있다.

사이드의 이런 변신은 영화 전체의 성격을 대변한다. 러셀의 수법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입체적인 것이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건 평면적인 배경 속에 있을 때다. 러셀은 입체적인 캐릭터나 설정을 진부한 설정과 스테레오 타입에 숨겨놓고 가끔씩 툭툭 튕겨올리면서 관객을 자극하려 하고 있다. 사이드를 다시 예로 들면, 그는 이중적으로 입체가 된다. 스테레오 타입인 다른 아랍 캐릭터들에 비해 튀고, 역시 스테레오 타입이었던 그의 몇십분 전 모습에 비해 튄다.

이런 트릭은 분명히 효율적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같은 수준의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한다. 이 트릭이 가장 잘 먹히는 대상은 적당히 스릴 넘치는 액션 영화를 기대하고 극장에 들어갔을 일반적인 미국 관객이다. 우리와 같은 외국인 관객의 눈엔 <쓰리 킹즈>의 남은 스테레오 타입은 입체적인 요소들까지 가려버리고 영화는 자명하고 뻔한 이야기를 별난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괜히 정색하면서 다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린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그들이 스테레오 타입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러셀은 무비판적인 미국인 관객의 자동 반응을 조작하는 것은 생각했지만 시작부터 비판적으로 들어오는 우리 관객의 자동 반응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입체적으로 재구성된 영화 속 걸프전

러셀이 이런 스테레오 타입 타파를 통해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부시 행정부의 걸프전 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러셀이 전면에 배치한 비판을 아주 단순하게 줄이면, 부시가 후세인과의 협상 때문에 반군과 민간인들을 방치한 건 옳은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민간인과 잔류 반군들을 이란으로 데려가는 마지막 모험은 분명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당시 미국의 행동에 대한 ‘참회’로까지 볼 필요는 없다. 주인공들을 ‘미국’과 동일시하는 우리 관객과는 달리, 러셀은 자신과 주인공들을 부시 행정부로부터 분리하고 있었을 테니까.

물론 그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하다. 그는 위에 쫙 걸쳐놓은 메시지보다는 걸프전 (또는 모든 전쟁)의 다양한 입장들을 다 펼쳐보이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 결과 각각의 입장들은 다른 입장들과 조금씩 모순되고 엇갈리게 깔리면서 걸프전이라는 전쟁을 재구성한다. 영화를 입체화시키는 러셀의 또다른 수법이다. 어떤 전쟁이건 메시지와 비판 몇개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걸프전도 예외는 아니다. 군수산업과 석유로 범벅이가 된 이권다툼이 눈에 보이지만 그래도 쿠웨이트를 그냥 방치했어야만 했을까? 러셀은 모두 그럴싸한 다양한 입장들을 늘어놓지만 이들 모두에게 공정한 해결책은 애당초 없었다. 이 점에서 러셀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 만약 그가 메시지만 몰고 나갔다면 영화는 훨씬 평평해졌을 것이다.

<쓰리 킹즈>의 ‘건전한’ 결말이 아쉬워보이는 것도, 러셀이 이 복잡함을 정리하고 어떻게든 간결한 해결책을 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해결책은 ‘미국인 주인공들에 의해 모든 것이 해결되는’ 틀 안에 갇혀서 영화를 더 작게 만들고 또 선심쓰는 것처럼 보이게도 만든다.

사실 러셀의 결말은 생각만큼 안이하지는 않다. 적어도 네 주인공들의 행동은 지극히 타당한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치적 캐치프레이즈를 생산해내고 메시지를 뿌리는 대신 옆에서 숨쉬며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그들의 행동은 영화 결말을 위한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러셀이 그들의 행동이 지나치게 선심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애쓴 흔적도 보인다. 마지막 위기를 해결하는 것은 네 주인공의 액션이 아니라 그들의 소극적인 포기이다. 사실 그 포기도 그렇게 대단한 희생은 아니다. 원래 가지고 있지도 않았던 것을 내주는 것이니까. 2천만달러가 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으니 애당초부터 머리에 와 닿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결말만으로는 우리 관객을 충분히 설득하지는 못한다. 영화의 자체적 한계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우리와 같은 외국 관객이 <쓰리 킹즈>라는 영화의 전략적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그렇게 힘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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