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선언>은 창고에서 썩고 있었지만 제작사 화천공사와 오래 전에 이미 <어둠의 자식들>을 3부작으로 계약했기 때문에 미리 가불한 돈을 갚기 위해서 이동철의 또다른 소설 가운데 <오과부>를 <과부춤>이라는 타이틀로 영화를 만들었다. 세 사람의 과부 이야기를 마당극처럼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옴니버스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84년 구정에 대한극장에서 자신만만하게 개봉했지만 관객을 끌어들이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사람들이 내 이름을 보고 무조건 영화를 보러오지는 않았다. 그 <과부춤>의 마지막 녹음 때였다. 제작사의 나이 많은 임원과 전화로 욕설을 주고받으며 크게 싸움을 했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냈는지? 지금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궁핍해서 그랬을 것이라 짐작되는데 이미 나는 사면초가로 쫓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흥분 끝에 담배끊은 지 오래 되었음에도 어느새 녹음기사에게서 담배를 얻어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화천공사와는 결별을 했다. 그뒤 나는 심한 경제적인 불안을 겪어야 했다. 웬일인지 다른 영화사에서도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제의가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작품을 들고 영화사를 쫓아다니면서 제작을 구걸한 적이 한번도 없었던 나는 속수무책 그대로 놀고 있었다.
<과부춤>의 흥행실패, 그리고 아직까지 창고에서 잠자고 있는 <바보선언>, 그것만으로도 나의 악소문은 작은 영화판 구석구석까지 알려졌다. 또 만든 영화 모두 “삐뚤어진 시선으로 사회의 어두운 면만 강조해서 그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었으므로 제작자들에겐 기피 대상자였다. 당시 안기부와 경찰 정보조직 중엔 영화담당이 몇명 있어 이들이 영화사를 순회하며 제작자들과 가까이 지냈다. 코딱지만한 영화판에 여러 가지 정보를 주고받고 또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흔히 제작자들이나 배급업자들과 골프장에서 만나 흘러가는 말처럼 “걔 안 돼. 끝났어. 색깔이 빨개.” 라든지 “걔 쓰지마. 다쳐.”라는 식으로 모진 놈 하나 간단히 머저리 만들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문단과 달리 영화를 죽이는 방법은 아주 쉬웠다. 검열을 손아귀에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일년 넘게 가불해서 살아가는 소위 가불 인생이어서 생활에 대한 고통이 금세 닥쳐왔다. 곤경을 돌파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새로운 화제, 폭발적인 화제가 동원되는 영화기획이 필요했다. 생각 끝에 당시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슈퍼스타의 위세를 보여주고 있던 가수 조용필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어 일본과 한국에 새로운 화제를 일으켜보자는 생각을 했다. 조용필쪽도 찬성이었다. 마침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일본에서 자주 상영돼 마니아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 때였다. 일본영화인들과 조금씩 교우를 넓혔다.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 오가와 신스케, 와카마쓰 고지, 오구리 고헤이, 영화평론가 마쓰다 마사오 등과 어울려 술마시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가끔 예쁜 여배우가 동행해 한국영화판을 전혀 모르는 그들은 나를 영화계의 실세로 착각했다. 그러나 조용필의 시간 내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또 그를 사로잡기 위한 돈이 나에겐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았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나는 친구에게 살고 있는 집의 등기부 등본을 억지로 떠맡기고 돈을 빌려 퇴계로에 사무실부터 얻었다. 이장호 워크숍이라고 간판을 걸었다.
어느새 나는 식구를 많이 거느리는 중견 감독이 돼 있었다. 이른바 이장호 사단을 관리할 수 있는 아지트가 필요했다. 이리저리 돈에 쫓기고 있으면서도 잔뜩 폼을 잡고 있을 때 구세주처럼 만난 것이 문화 영화였다. 16mm 필름으로 새마을 영화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우선 돈이 필요했으므로 나는 기꺼이 승낙했다. 강원도 횡계의 어느 산골마을에 사는 새마을 지도자의 성공 사례를 영화로 만드는 일이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일송정 푸른 솔은> <바보선언> <과부춤> 끝에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잘살아 보세> 새마을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오구리 고헤이가 생각이 났다. 일본영화계의 유망주로 <더러운 강>이라는 영화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은상을 받았던 친구다. 그가 과거에 포르노 필름을 만들어 영화적 생명을 연명했다는 사실이 나에게 큰 위로와 변명이 되었다.
그런데 횡계의 촬영현장에서 정말 잊을 수 없는 난처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몹시 부끄러웠지만 아마도 이런 일은 내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겪지 않으면 안 될 새로운 시련의 시작이었다. 어느 날 횡계에 또다른 촬영팀이 도착했다는 소식과 함께 어마어마한 장비와 엄청난 숫자의 엑스트라가 동원된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건 배창호 감독의 작품이었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의 촬영을 위해 대규모의 스탭 캐스트를 이끌고 온 배창호는 하필이면 16mm 문화 영화를 촬영하러 온 이장호와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는 내 조감독이었고 고등학교 후배였다. 다시 말하면 사제지간이었다. 좋은 의미에서 내가 기른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가장 비참할 때와 가장 호화로울 때 두 사람이 공교롭게 마주친 것이다. 전쟁의 피난민 행렬을 찍기 위해 대형 크레인과 각종 특수 장비를 동원한 배창호의 촬영팀과 어느 날 오징어 불고기 식당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가깝게 지내던 안성기, 이미숙 등이었지만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자꾸만 열등감으로 일그러지고 있는 얼굴을 태연하게 펴기 위해 마치 타인을 달래듯 토닥토닥 내 자신을 달래려 무진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