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제타 존스는 아름답다. 천성적으로 여배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엔트랩먼트>를 세번씩이나 본 것은 순전히 그녀의 섹시한 엉덩이와 고혹적인 눈빛 때문이었다. 으흠, 저 정도라면 과연 마이클 더글러스가 몇백만달러의 게임비(이혼위자료)를 치르고서라도 달려들 만하군! 스크린 속의 여자에게 반한 것은 마릴린 먼로 이후 거의 20년 만의 일이어서 새삼스럽게 사춘기로 돌아간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때로는 한심해보이는 반복만이 숨겨져 있던 비밀을 드러내주는 법이다. 꼼꼼히 들여다보라. <엔트랩먼트>의 시나리오는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그저 ‘웰메이드’ 테크노 액션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그 저류에 흐르고 있는 두 도둑 남녀(!)의 멜로라인 역시 범상한 수준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본질적으로 ‘빤할 수밖에 없는’ 멜로라인을 서브플롯이라는 좁은 범주 내에서도 이만큼 자유자재로 변주할 수 있는 작가라면? 필모그래피를 뒤져보던 나는 전율했다. 대어(大魚)의 손맛을 아는 낚시꾼처럼 등줄기에 잔소름이 돋았던 것이다.
론 바스는 LA 토박이다. 병약했던 그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서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 엄청난 독서광으로 자라났다. 그런 그가 도스토예프스키나 윌리엄 포크너를 우상으로 떠받드는 작가지망생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 홀로 악전고투하던 병약한 소년은 놀랍게도 17살때 첫 번째 장편 소설을 탈고하지만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아” 박박 찢어발겼다고 한다. 병상에서 일어난 론은 이제 작가의 꿈을 접고 학업에 몰두하여 미국 최고의 엘리트 코스들을 차례로 섭렵한다. 스탠퍼드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우드로 윌슨 펠로십을 따서 예일대학에서 공부하고, 하버드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다음 연예산업에 정통한 잘 나가는 변호사로 우뚝 선 것이다.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남은 여생을 즐길 궁리에 빠져들었겠지만 론은 달랐다. 타고난 책벌레이자 집필광이었던 론에게는 돈 잘 버는 변호사 생활이 너무 따분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소년 시절 품었던 작가의 꿈을 그냥 묻어버릴 수 없었던 그는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까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장편 소설이 세편. 그 중에는 17살 때의 장편을 복원한 <완벽한 도둑>과 훗날 그가 직접 시나리오로 각색해 영화로 완성한 <코드네임 에메랄드>(1985)도 포함된다. 마흔이 넘은 나이로 할리우드에 신고식을 치른 첫 작품이 <비서 사만다>(1984). 이후 부자관계를 주축으로 하는 첩보물 <진 해크만의 표적>과 베트남 반전 영화 <병사의 낙원>을 거쳐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작인 <레인맨>에 이르자 론은 아예 변호사 생활을 때려치우고 서재에 틀어박힌다.
1990년대는 론 바스의 시대였다. 섬세한 멜로에 강한 그는 줄리아 로버츠를 주연으로 기용한 세 작품 <적과의 동침>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스텝맘>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안정된 작품세계를 구축한다. <조이럭 클럽>과 <사랑을 기다리며>는 그의 페미니스트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최근에 개봉한 <삼나무에 내리는 눈>은 어느모로 보나 론에게 적합한 작품. 정치학과 법률지식 그리고 각 캐릭터들 간의 멜로라인이라는 세 방향의 화살표가 모두 론에게 집중돼 있는 까닭이다. 그의 차기작으로 예약돼 있는 것은 <영혼은 그대 곁에>에서 이미 한번 호흡을 맞춰본 적이 있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게이샤의 추억>.
나이가 들어가면서 원숙함을 더해가는 작가를 바라보는 것은 즐겁다. 나이 오십을 넘어서면서 그는 매년 평균 3편의 시나리오를 써낸다. 비결? 간단하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작가가 된 이즈음에도 여전히 새벽 2시에 일어나 글을 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내 및 두 딸과 함께 아침식사를 한 다음에도 출근하지 않는 대신 해가 질 때까지 계속 글을 쓴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너무 게으르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