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주간 영화판이 꽤 시끄러웠다. 강우석 감독의 발언으로 촉발된 사태는 최민식, 송강호의 기자회견을 거쳐 강우석 감독의 사과문 발표로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이번주 <씨네21>은 불똥이 엉뚱한 방향으로 번진 것은 잠시 잊기로 하고 문제의 핵심에 집중하는 특집기사를 준비했다. 한 가지 미리 말하자면 우리가 기사를 준비한 것은 이번 소동이 있기 오래전부터다.
사실 지난 십수년간 한국영화가 위기에 처하지 않은 시점은 한번도 없다(내가 이런 유의 기사를 쓴 것만도 여러 번이다). 올해의 위기가 특별하다고 느낀 건 한국 영화산업이 어떤 한계에 도달했다는 느낌 때문이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난 10년간 한국영화는 성장일로에 있었다. 극장이 늘어나는 만큼 관객이 늘었고 엄청난 제작비에 1천만 관객이 화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영화가 일찍이 꿈도 꾸지 못한 액수로 외국에 팔리는가 하면 한류를 타고 스타 산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다. 거칠 것 없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제작자도 배우도 매니저도 아니었다. 꼭 집어 말하면 그것은 관객이었다. 제작자도, 배우도, 매니저도, 언론도 한국영화 뒤에 1천만 관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불과 1년 만에 관객은 그들 모두를 따돌리고 자신의 존재가 신기루라는 걸 보여줬다(정확한 흥행집계가 뒷받침되어야겠지만 관객의 열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공멸의 위기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성공의 환희가 만들어내는 환상의 협주곡은 누군가 그것의 실재를 의심하는 순간 불협화음으로 돌변한다. 말하자면 지금은 환상과 실재를 구별해야 할 시점이다. 나는 이번 특집이 그런 의미로 읽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럴 때만 올해의 위기가 환상에서 실재로 가는 또 한번의 통과의례가 될 것이다.
아마 영화계 여기저기서 대안은 있는가, 라는 말을 할 것이다. 법과 제도와 협약을 이렇게 저렇게 만들자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언제나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영화가 나오느냐에 있다. 예를 들어 난 이창동 감독이 연기학교 교장을 맡는 것보다 영화 만드는 데 집중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제작자들이 배우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배우들을 제대로 활용할 영화를 기획하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제작자와 매니지먼트의 갈등이 폭발하던 날, 시사회에서 <여고괴담4: 목소리>를 보면서 느낀 것도 이런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여고괴담> 1편이 한국 장르영화의 가능성을 열어젖힌 것은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1천만 관객을 동원한 것 이상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지금 막 탄생한 4편은 한국 호러영화가 어떻게 진화할 수 있는지 보여준 영화였다. 여기엔 스타도 없고 엄청난 제작비도 없다. 신선한 아이디어와 새로운 배우들과 기본기에 충실한 연출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번주 기획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여고괴담4: 목소리>는 그냥 장르의 변주에 만족하는 영화가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을 세심하게 어루만지는 영화다. 개인적인 감상 하나를 덧붙이자면 귀신을 염려하여 울컥, 가슴이 복받친 것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이후 이 영화가 처음이다.
이런 영화를 양산할 수만 있다면 한국영화가 실재와 마주해도 두려워할 일은 없지 않을까. 한국영화에 희망이 있다면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고괴담4: 목소리>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