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천군> 기자 시사회 현장
2005-07-12
글 : 이영진
<천군>의 주요 출연배우들. 왼쪽부터 황정민, 박중훈, 김승우, 공효진

8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천군>이 베일을 벗었다. CG등 후반작업 일정이 늦어졌던 영화 <천군>이 7월11일 오후 2시 서울극장에서 시사회를 가진 것. 이날 자리에는 박중훈, 김승우, 황정민, 공효진 등 주요 출연배우들이 참석했고, 이들은 상영 전 무대에 올라 몽고, 중국 등지를 돌며 7개월 동안 찍었던 영화에 대한 소회를 간략하게 털어놨다. 이순신 역을 맡은 박중훈은 “항상 그렇지만 이번에도 시사회를 앞두고 소풍가기 전날 비오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과 '재밌겠지' 하는 설렘이 교차했다”며 “(오늘 날씨처럼) 비오는 영화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약간 비가 오더라도 우산을 받쳐달라”고 분위기를 띄웠다.

알려져있듯이, <천군>은 남북한 군인들이 우연한 계기로 400여년전 과거로 회귀해 젊은 날의 이순신과 조우한다는 줄거리. 북한군 장교 강민길(김승우)이 돌출적으로 핵무기 비격진천뢰를 탈취해 달아나자, 남한군 장교 박정우(황정민)가 이를 뒤쫒게 되고, 압록강 유역에서 대치하던 두 무리는 마침 433년만에 지구를 지나는 혜성에 휩쓸려 난데없이 1572년 조선 변방마을로 떨어진다. “저 사람이 정말 성웅 이순신이 맞단 말인가?” 무과에 낙방한 뒤 자신을 후원해준 장인을 볼 면목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채 변방을 떠도는 이순신(박중훈)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물. 명나라 상인들을 상대로 인삼을 몰래 팔아 넘기는 밀매 또한 마다하지 않는다.

이씨 조선을 인정하지 않으니 이순신은 흔적없는 허상이라고 깔보는 북한 군인들이나, 나라를 구한 민족의 영웅으로 이순신을 떠받드는 남한 군인들이나, 오랑캐의 약탈 앞에서도 제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이순신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추레한 행색에 더부룩한 머리털 흩날리는 이순신 또한 ‘한판 붙자’며 반말을 지껄이는 강민길 무리와 ‘장군님!’이라고 깎듯이 모시는 박정우 무리의 등장이 황당한 건 마찬가지다. 이들을 ‘장인이 보낸 스파이’라 넘겨짓는 이순신과 “장군이다, 아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온 남북한 후손들의 아웅다웅 해프닝은 배꼽 쥐어잡고 폭소를 터트릴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고루 배분된 역할을 어느정도 소화해 낸 출연진 덕에 그럭저럭 전반부를 끌고 간다.

그러나 중턱을 넘는 순간부터 <천군>은 의도한 바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큰 일을 도모하실 것이라며 자신을 다독이던 미래의 후손이, 아무것도 모르는 고아 소녀가 자신의 눈앞에서 여진족에게 죽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이순신은 갑자기 뜨거운 ‘핏줄’을 깨닫는다. 그리곤 주먹을 불끈 쥐고, 머리를 동여매고, 활을 쥐어든다. “니네는 적도 아니면서 왜 만날 이렇게 싸우나?”라고 심지어 미래에서 날아온 후손들에게 일침을 가하기까지 한다. “민족보다 우선하는 건 없다” 예정대로 비장한 음악이 뿜어져 나오면, 이순신과 그의 후예들의 칼과 총은 참았던 분노를 터뜨린다. 그리고 여진족의 흉부에서는 지나칠만큼 많은 피가 한꺼번에 솟구쳐 오른다.

상영 후 기자회견에서 “(이 영화가) 한반도의 냉전 종식에 자그마한 기여를 했으면 좋겠다”고 민준기 감독은 밝혔지만, 그의 뜻은 <천군> 안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기록으로 문을 연 영화는 “그들이 모든 걸 버려 지켜낸 나라입니다. 우린, 뭘했죠?”라는 핵물리학자 김수연(공효진)의 한탄으로 막을 내린다. 일당 백으로 맞서 싸운 명랑해전의 함성을 덧입히면서. 영화는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은 위정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일갈하는 것 같지만, 일견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선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과격한 자위론으로 들리기도 한다. 현실을 무시한 상상에 하나만 딴지를 걸어보자. 남북정상회담이 어떻게 남북공동 핵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가.

“영웅의 외피를 벗겨낸 인간 이순신을 만난다”는 참신한 설정은 수시로 등장해 영화 속 듬성듬성한 틈을 메꾸는데 사용되는 민족 이데올로기와 만나 “어쨌거나 이순신은 불세출의 영웅이었다”는 신화로 탈바꿈한다. “경제는 추락하고, 경제를 살려야 할 이들은 정치싸움에 눈멀어 있으며, 북한 핵문제는 또 다시 살얼음판이다. 이럴때 우리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영웅을 원한다”는 제작진의 기획 의도를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영웅 없는 불행한 시대를 뒤엎는다고 영웅을 필요로 하는 더욱 불행한 시대를 조장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천군>은 <유령><2009 로스트메모리즈> 등보다 후퇴한 역사 인식을 내보이는 영화다. 7월1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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