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기쁜 우리 젊은 날> 의 황신혜
2005-07-14
우아하고 도도한 ‘혜린’ 욕망과 허영 좇다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 그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낀다

‘그대가 생명과 같은 사랑을 원한다면 난 그대를 사랑하지 않겠소. 생명은 한숨과 같은 것이니까. 그러나 그대가 영혼과 같은 사랑을 원한다면 난 그대를 사랑하겠소. 왜냐하면 영혼은 영원한 것이니까.’

핀 라이트가 비추는 무대에서 슬립 차림의 여자가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다. ‘일찍 깨시더라도 절 깨우지는 마세요. 저는 아침잠을 즐기거든요. 그럼 불을 끌까요?’ 넋을 놓고 혜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영민이 보인다. 그 순간 영민이 되어 침을 꼴깍 삼킨 것은 나뿐이 아니었을 거다.

혜린(황신혜)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찾아왔다. 브로드웨이와 뉴욕을 향한 그의 눈에 한국의 무대는 천박하고 상투적이다. 그런 그에게 뉴욕의 산부인과 의사라는 오성우가 찾아오고, 그에 비하면 가난하고 수줍은 영민의 사랑은 우습고 촌스럽다. 그리고 그는 화려한 꿈을 좇아 뉴욕으로 떠나버린다. 무대 위에서 보였던 아름답지만 허영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내가 <기쁜 우리 젊은 날>의 혜린을 만난 것은 1987년이다. 거리엔 매일 최루탄과 돌이 날았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뭔가 바꿔낼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겨가고 있었다. 외치지 않는 영화는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어 결국 저들의 편을 드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전투적으로 영화를 보던 그때다. <킬링필드>에 분노하고 <바보선언>에 열광하고 <전함포템킨>을 몰래 보던 영화과 2학년 시절 ‘누구 편인지 한번 보자’ 뜯어먹을 기세로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봤다. 작은 일 하나에도 선진국을 들먹이며 미국은 어떻고 유럽은 어떻다고 비교하던 시대. 미국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절대 선이었던 그 시대와 혜린은 많이도 닮아 있었다. 황신혜는 도도하고 허영이 가득한 혜린의 모습 그 자체였고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에 기가 질려 영화 속 영민도 영화를 보는 나도 한없이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김대승 감독

몇 년이 지나고 종합상사의 직원이 돼있는 영민은 우연히 지하철에서 혜린을 다시 본다. 많이 지치고 초라하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너무 완벽하여 영민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던 그에게 틈이 생긴 것이다. 꿈만 같던 욕망의 끝을 본 그는 허영이 만든 상처에 자기 보호를 위한 자존심의 벽을 세워 여전히 사랑으로 기다리는 영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결같은 영민의 헌신과 사랑에 그 벽은 무너지고 꿈같은 시절이 짧게도 지난다. 그리고 행복한 결혼과 임신. 임신 중독으로 자신의 목숨과 아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때 긴 시간 한결같은 영민의 사랑에 대한 답으로 아이를 남겨놓고 죽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혜린이 뉴욕에서의 좌절을 슬프게 고백하던 그 벤치에 영민과 혜린을 닮은 아이가 남아 이야기를 나눈다. 혜린은 자신의 욕망과 허영을 다 드러냈지만 그것이 가져온 비극의 결과도 자신의 고통도 다 고백한다. 그리고 진실한 사랑이 어디 있었는지 뒤늦게 찾아 내 부끄러운 얼굴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어쩔 수 없이 연민과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외치지 않는 영화는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시절, 영화를 한쪽 눈으로만 보던 색맹의 시절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영민의 오랜 기다림과 배창호 감독의 긴 호흡은 정말 근사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으니까. 그 유려한 롱테이크와 미장센은 색맹인 나에게도 아름다운 색으로 보여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나는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사랑을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이제 어렵지 않을까?

이제 나는 영민만큼 순수하지 못하니까. 색맹은 치료됐는지 모르겠지만 눈에 탐욕이라는 장막이 하나 생겨버린 것 같다. 어떤 쪽이 더 큰 장애인지 생각하게 된다. 부끄러운 얼굴로 다시 돌아온 혜린은 내게 자꾸만 그 시절을 돌아보라고 한다. 거기엔 심한 색맹이지만 순수한 열정으로 사랑하는 내가 있다. 나는 여전히 우리에게 바꿔야 할 것들이 남아있고 내 영화가 거기에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김대승/ 영화감독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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