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씨 맞으세요? 하마터면 뜬금없는 질문을 던질 뻔했다.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이 영화 개봉되면 앞으로 한 2년 동안은 영화 못 찍을지도 몰라요” 하고 까르르 웃음을 쏟던 그는 예고편을 통해 본 금자 캐릭터가 좀 이상하다는 말에 “많이 이상하죠? 상당히 상태가 안 좋죠?”라며 유쾌한 리듬으로 받아넘긴다. 그동안 차가움, 과묵함, 감춤 등의 단어가 어울렸던 이영애가 얼굴에 반달 모양의 주름을 새긴 채 명랑하게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다. 방 안에 홀로 있어도 헤죽 입을 벌리고 싱글거릴 것 같은 저 ‘오버스러움’의 정체는 뭔가.
“예고편을 보면서 제가 좋다는 느낌이 드니까 기대되는 건 맞죠. (웃음)… 음악이나 믹싱이 안 된 채로 가편집본을 봤는데, 제가 저에 대해서 100% 만족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시나리오보다 훨씬 재밌게, 전체적으로 잘 나온 것 같아서 설레기도 하고….” 이쯤되면 고도의 논리를 구사하지 않는다 해도 사정이 대충 짐작된다. 이영애가 평소와 달리 들떠 있는 이유는 <친절한 금자씨>가 그를 들뜨게 할 정도로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거나, 그가 ‘연막전술’을 펴야 할 만큼 완성도가 떨어지는 탓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아직 기자시사회는커녕 시나리오도 공개되지 않아 영화의 알맹이에 관해 짐작할 길이 없으니, 일단 이영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기로 하자. 하긴 박찬욱 감독의 이름이나 촬영현장, 포스터, 예고편, 홈페이지 등을 고려할 때 이 영화가 문제작이 아닐 가능성은 극히 적으니깐.
설사 영화가 나쁘다 해도 <친절한 금자씨>가 이영애라는 배우를 재발견하게 할 것만은 틀림없다. 이런저런 데서 나온 단편적인 정보만을 짜깁기해봐도 이영애의 금자 연기는 ‘파격 변신’이니 ‘기존 이미지를 훌훌 털어버리고’ 따위의 상투적인 수사를 피해 표현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 새끼는 찾았어?”라는 친구의 질문에 화장을 하다가 무표정하게 “어…”라고 말하고 “죽였어?”란 물음에 “아직”이라고 무심하게 답하거나, “기도는 이태리 타올이야. 껍질이 벗겨지도록 빡빡 밀어서 죄를 벗겨내. 그럼 애기 속살로 변해. 알았지?”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금자를 이영애가 연기했으니 말이다. “저 죽겠어요. 중간에 장면장면 볼 때마다 제가 놀라는 게 있거든요. 욕하는 장면이라든가. (웃음) 아직도 보고 흠칫흠칫 놀라요. 하물며 저도 그런데, 제 이미지만 보던 사람들은 더 놀라지 않을까요. (웃음)” 그래서였을까. 박찬욱 감독은 <…금자씨> 10회차 촬영을 마쳤을 무렵,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문소리나 전도연이 했으면 안 웃길 텐데 이영애라서 그런 게 많아요… 이영애가 한번도 해보지 않은 표정을 짓고… 계속 낯설고, 그것이 낯설다 못해 코믹한 지경이 돼요.” 어쩌면 이날 보여진 이영애의 낯선 모습은 <…금자씨>라는 필터를 통과하면서 약간 성분이 변한 데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예전의 이영애가 1 더하기 1을 2라고 했다면 이 영화를 찍으면서는 1 더하기 1은 어, 4가 아닐까, (웃음) 하는 그런 엉뚱함이 생긴 게 좀 달라진 점 같기도 해요.”
이영애가 연기하는 이금자는 어린 날 백 선생(최민식)의 꾐에 빠졌고, 한 어린이를 유괴·살인한 죄를 뒤집어쓴 채 감옥에서 13년 세월을 보낸다. 백 선생에 대한 복수의 일념을 품은 그는 한쪽에서는 ‘친절한 금자씨’라 불리고, 다른 쪽에서는 ‘마녀 이금자’로 알려지는 이중적인 삶을 산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자신을 ‘친절한 금자씨’로 기억하는 감방 동료들의 도움을 얻어 백 선생에 대한 복수를 천천히 실행에 옮기게 된다. ‘친절한 금자씨’와 ‘마녀 이금자’, 도대체 진짜 금자는 누구인가. “그건 관객의 몫인 것 같아요. 이 여자가 정상인가 아니면 분열증자인가는. 제가 원하는 건 관객에게 금자의 진심이 와닿는 거예요. 저 여자가 저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쟤 왜 저래, 이렇게 외면을 당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이번에는 지난 ‘복수 시리즈’와 달리 복수를 위한 복수가 아니라, 속죄와 화해를 위한 복수, 따뜻함을 가진 복수였으면 좋겠어요.”
그것을 ‘파격’이라 부르건 ‘도전’이라 부르건, 금자가 되기로 한 것은 그의 기꺼운 판단이었다. “<대장금>이 끝나갈 무렵, 보람과 함께 아쉬움이 느껴졌어요. 여타 드라마가 그렇듯이 아무리 여유있게 간다고 해도 완벽하게는 안 되니까 배우 입장에서는 영화보다 아쉬운 게 크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영화를 한다면 조금 작가주의적인, 영화적인 요소를 갖춘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박 감독님을 생각했어요.” 그는 박찬욱 감독에게 독립영화라도 좋으니 함께 작업할 게 없겠냐고 타진했고, 마침내 <…금자씨>의 시나리오를 받아들었고, 또 받아들였다. 서른 하고도 다섯의 나이, 이제 모험보다는 안정을 택할 법한 상황에서, 그것도 장금이의 생글생글한 이미지가 화려한 후광으로 비치고 있는데, 속되게 말해 가만히 누워 있어도 각종 CF가 밀려들어올 타이밍에 한국영화 사상 유례없이 괴이한 캐릭터를 맡다니 말이다.
혹시 이영애는 금자가 되기 전부터 이미 금자의 엉뚱함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 이미지를 죽 가져갈 수도 있겠지만, <대장금>으로 넓어진 연기 폭에 가속도를 붙이고 싶었어요. 또 저를 오래 봐왔던 분들은 알겠지만, 초창기에는 TV 속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었거든요. 털털한 역할도 했고 술집 작부 역할도 했고. 얼마 전 금자의 19살 때 모습이 공개됐는데, 애초엔 그런 날나리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가 1996년 장수봉 감독님의 <동기간>이란 드라마에서 용자란 이름의 여고생 날나리로 나왔었거든요. 너무 애착이 가는 캐릭터여서 감독님과 얘기하면서 그렇게 바꿨어요. 그러니까 금자는 이영애라는 배우의 종합선물세트라고 보시면 될 거예요.”
궁금해진다. 이영애의 종합선물세트 상자에는 어떤 과자와 어떤 사탕과 어떤 초콜릿이 들었는지. 철저한 비밀주의와 엄중한 보안유지로 도무지 접근이 불가능한 <…금자씨>라는 단단한 성채의 내부도.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용해 슬쩍 <…금자씨>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질문을 던진다. “금자가 복수에 성공하냐고요? 그건 얘기하면 안 되죠. (웃음) 근데 그것 또한 성공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관객이 보시고 많이 얘기하셨으면 좋겠어요. 보고 나서 와 기쁘다, 아 슬프다, 이런 것보다는 좀 찝찌름한 기분을 느끼셨으면 해요. 극장에서 나오는 길에 오늘은 정말 술 한잔해야겠다, (웃음) 막 이런 말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하곤 이영애는 이내 점심은 먹었냐, 배 고프지 않냐, 케이크를 시키면 먹을 거냐, 케이크가 나왔는데 왜 안 먹냐고 세심하게 챙겨주기 시작한다. 결국, 그날 북아프리카풍 카페에서 마주한 존재는 ‘친절한 영애씨’ 또는 ‘명랑한 영애씨’였다. “이 영화를 통해 새로 드러난 제 모습도 사실은 제가 애초 갖고 있었던 것이었나 봐요”라는 그의 말이 비로소 다시 떠오른 것은 자동차가 막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