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가장 시니컬하고, 엽기적이고, 지독하게도 내 세계 안에만 빠져 살았던 시절을 꼽으라면 당연 고등학교 때였다. 세상이 다 시시했고, 어른들은 지독히도 유치하게 보였으며, 말 못할 비밀은 어찌나 많았던지. 만약 몰래 일기장을 훔쳐보는 인간이 있다면 칼이라도 들이댈 듯 심각했던 시절이었다. “낙엽 구르는 소리에도 깔깔깔” 이라니 미친 거 아냐? “그 옛날 꿈 많은 여고시절…” 이라니 웃기셔.
게다가 나는 네, 다섯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룹문화에 익숙하지 못했던 아이여서 마치 모노가미의 서약에 빛나는 맹세라도 한 냥, 한 시기에는 한 친구와만 죽어라 붙어 다녔다. 그래서인지 친한 친구는 많았지만 진짜 친구는 지금 손 꼽아보아도 한 학년에 한 명이 될까말까다. 그러니 누군가를 ‘내 친구’로 받아 들인다는 것은, ‘내 세계’로의 진입을 허락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의미였다.
그렇게 때론 소녀들의 만남은 든든한 완충장치에 둘러 싸여진 어른들의 부드럽고 일상적인 만남과 소년 소녀 사이의 풋풋한 떨림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같은 성을 가진 대상으로서의 강렬한 동경과 동화에의 욕망, 혹은 그에 따른 시기와 질투. 그 과정은 마치 표면은 딱딱해 보이지만 속은 아직 연한 액체로 차있는 어린 행성들의 충돌처럼 강렬한 것이다. 때론 두 세계가 다 터져버려 범벅이 되어 버리는, 때론 그 충돌로 인생이 바뀌는.
최근 뉴욕에 개봉한, 레즈비언 영화라고 오해하면 곤란한 잉글랜드산 소녀 성장기 <마이 썸머 오브 러브> (My summer of love)는 이런 소녀들의 내밀한 심리와 극단적인 관계의 끝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이 영화 속 아름다운 두 소녀들은 서로 한 눈에 반해버려 충동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그 두 세계의 격한 부딪힘은 결국 한 세계의 파괴 후에야 진짜 결론에 이른다. 그렇게 누군가를 숲 속에, 혹은 마음의 무덤에 묻고 홀로 오솔길을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에는 힘들게 내려진 ‘소녀시대’ 마지막 장과 새롭게 펼쳐질 ‘여성시대’ 의 첫 장이 아련하게 오버랩 된다.
최근 맨하탄 웨스트빌리지 초입에는 ‘IFC(인디펜던트필름채널)센터 라는 새로운 시네마떼크가 문을 열었다. 이 극장의 개관작은 바로 올해 선댄스를 조용한 흥분으로 몰고 갔던 미란다 줄라이 감독의 데뷔작 <나, 너 그리고 우리가 아는 모든 이들>(Me and You and Everyone we know)이었다. 한 동네를 살아가는 ‘나’와 ‘너’와 ‘우리가 아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천연덕스러운 데뷔작에는 동네 고등학생 소녀 둘이 나온다.
자신들의 성적능력을 비교하던 옆집 남자의 발언에 발끈해 순진한 동네소년을 잡아 놓고 교대로 오럴섹스를 해주고 난 뒤 “누가 더 좋아?”라고 물어봐야 적성이 풀리는 이상한 여자아이들은 <마이 썸머 오브 러브>의 비밀스러운 소녀들보다는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엽기적인 두 소녀와 닮아 있었다.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이니드(도라 버치)와 레베카 (스칼렛 죠한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할일 없이 동네에 매일 죽치고 앉아 동네 사람들을 스토킹하고, 세상 만사를 다 자기 식대로 비판하고, 일없이 머리 색이나 바꾸고, 가끔 인생 하등 도움 안 되는 남자와 섹스나 하는 철없는 것들이었지만, 적어도 세상의 가짜들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소녀들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가는 소녀들에겐 어느덧 선택의 시간이 닥치게 마련이다. 유령의 세상을 떠나느냐, 아니면 그 가짜들과 비비고 살아야 하는 유령의 세상에 남느냐. 그렇게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남는다.
나에겐 세상만사 별로 신나는 일도, 즐거울 일도 없는 여자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녀석과 나는 꼭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이니드와 레베카 같았다. 종로 버거킹2층 같은 데서 배도 안부를 스낵이나 몇 개 시켜놓고 지나가는 사람들 세무조사부터 각종 인물평을 늘어놓곤 했던 우리는 남들이 보기엔 좀 한심한 여자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뭐 하나 해놓은 것도 없는 주제에 세상에 불만만 가득한 녀석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열광케 했던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시네코아 극장에서 본 <판타스틱 소녀백서>였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나’를 보았고 ‘너’를 보았고 ‘우리가 아는 모든 이들’을 본 것이었다. 그렇게 그 녀석과 어울린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 역시 더 이상 ‘소녀’라는 호칭이 민망해 지는 나이가 되고야 말았다.
얼마 전 없는 돈을 쪼개서 뉴욕을 방문 한 그녀와 나는 <빌리지 보이스>를 보던 중 작은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영화 <고스트 월드>의 원작이 된 동명의 만화 작가인 다니엘 클로우스와의 만남이 있다는 광고를 발견한 것이다. (서점체인인 ‘반즈 앤 노블스’의 ‘작가와의 만남’ 리스트는 어찌나 화려한지 언제나 숨이 막힐 지경이다) 시큰둥하기로는 전 우주를 통틀어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그 녀석이 일주일 동안 가장 흥분해 하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신간 <아이스 헤븐>(Ice Heaven)의 발간에 맞춰 뉴욕을 찾은 이 시카고의 만화가는 멀대 같이 큰 키에 조금은 졸리는 듯한 눈을 가진, 하지만 어딘가 ‘고스트 월드’의 창조자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법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인을 받으려는 긴 행렬에 서있는 우리들은 극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거 알아요?… 우리 둘도 한 때는 <고스트 월드>에 나오는 그 소녀들 같았어요”
“음… 누가 레베카고 누가 이니드였을까?”
“글쎄… 반 반?”
“그렇지. 사실은 그렇게들 다 섞여 있는 거죠,. 그런데 이제 당신들은 더 이상 그런 소녀들이 아닌 건가요? … ”
글쎄 그 때 우리는 그 버스를 탔었던가? 아니면 여전히 이 ‘유령의 세계’를 비겁하게 떠돌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우리가 지금 ‘같은’ 세상에 ‘함께’ 존재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 곳이 어디인들 여전히 세상의 모든 거짓과 허위를 함께 조롱하며 비웃어줄 수 있다면, 그런 친구가 옆에 있다면, 설령 ‘유령의 세상’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심심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심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든든한 위로가 어디 있으랴. 소녀이건, 처녀이건, 아줌마건, 할머니던 간에. 언젠가 호호백발이 되어 두 손을 꼭 잡고 이 유령의 세상을 떠나는 저 버스를 함께 탈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