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배우, 직업이자 취미이자 특기", <플란다스의 개>의 이성재
2000-02-22
글 : 이영진
사진 : 정진환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꼬질한 차림에 어수룩한 윤주가 뭘 생각하는지 정도는 말이다. 그런데 ‘추리닝’에 손 넣고 빈둥대는 윤주가 오늘은 심상찮다. 삐주룩한 머릴 빨간 조교 모자로 감추고 얼굴 반만한 크기의 뿔테 안경으로 변장하고 나선 것이다. 주위를 살피는 윤주. 곧바로 자신의 적 강아지를 싸고도는 주인이 방심한 틈을 타 재빨리 다가가선 냉큼 집어든다. 그러고는 주인이 뒤돌아볼 틈도 주지 않고 비호처럼 옆 화단으로 몸을 날린다. 그러곤 성공을 외친다. <플란다스의 개>는 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아파트는 실험실로 변한다. 계속 반응하느라 헐떡대는 윤주는 이성재가 아끼는 또 하나의 분신이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캐릭터예요. 때론 과장이나 극단적인 면도 갖고 있고. 떳떳하거나 마음 편한 위치에 당당히 서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살아가면서 다들 갈등하는 거죠. 순수와 타협의 갈림길에서 희화화한 윤주는 제 모습이기도 해요.”

원래 무겁고 신경질적인 윤주라는 캐릭터는 이성재가 가세하면서 많이 누그러졌다. 손을 다리 사이에 끼워 넣고 자는 모습은 그가 만들어 넣은 것. 전작들이 정형화한 캐릭터들의 갑옷을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면 이번 작품은 일상적인 느낌으로부터 출발해서 비일상적 상황으로 이어갔다. 자신이 만들어가야 하는 캐릭터라 힘들었을 텐데도 한결 몸이 가벼웠단다. “그래도 카메라 앞에서 마음껏 연기하고 편하게 놀려면 아직 멀었죠.” 일상의 톤에서 진폭이 변해 광끼를 드러내는 몇몇 장면은 힘들었다. 순자를 찾는 전단을 복사하는 디테일한 장면도 머리 속 꽁꽁 뭉친 자책감을 터트려내지 못한 것 같아 찜찜하다. 일할 때는 예민해지는 점이 비슷한 봉준호 감독과 촬영 들어가기 전 아파트 주위를 함께 어슬렁거린 것도 그 때문이다. 감정선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윤주를 곱씹었다.

“한 작품 끝내고 나면 에너지가 바닥나야 정상이지만 나는 반대예요.”. 이성재는 풀어놓은 만큼 축적한다. 배워 나가는 낮은 자세의 웅크림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연기에 회장이나 대표이사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큰 거 하나 건진다는 마인드는 제겐 의미없어요. 평생 할 일인데 미리 조급해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작은 것이라도 하나씩 얻어 모은 걸 다져가는 거죠.” 그에게 특별한 트레이닝 방법은 없다. 다만 ‘눈과 귀를 열어놓은 뒤 접수된 일상의 느낌들을 오랫동안 간직’하려고 노력한다. “사람 속엔 누구나 일탈 욕구가 있을 거예요. 도덕이나 시선 때문에 구겨놓은 은밀한 속내 같은 것 말이죠. 많잖아요. 음탕하고 소심하고 때론 시니컬하고. 그렇게 숨어버린 욕망들을 오히려 크게 확대해 보여줄 수 있을 때 묘한 쾌감이 전해져 와요. 저에겐 직업이자 특기이자 취미인 배우만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죠.”

“달밤에 몸 만들어야죠.” 시나리오 수정중인 강우석 감독의 <신라의 달밤>에서 깡패 보스 역을 맡은 이성재. 3∼4kg 정도 감량해야 한다면서 밤시간까지도 체육관에서 보낼 생각이다. “잔인한데다 허풍끼도 상당한 보스죠. 공부 잘하는 친구에 대한 콤플렉스가 남아 있는데다 여린 면도 있고 여자 앞에선 마음을 컨트롤 못해 오버하기도 해요. 설정은 <주유소 습격사건>의 노마크와 비슷하지만 훨씬 기복이 심한 인물이더라구요.” <정사> 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슬그머니 드라마 <거짓말>의 준희를 꺼낸다. 그때 부족했던 부분을 언젠가 메우고 싶다는 이성재. 틀린 문제를 다시 체크하는 모범생 기질이 다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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