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란 옷이 공기와 같아서 입고도 입은 줄 모른다면, 결국 문화를 잡는 방법은 그릇과 종지, 촛대와 장신구 같은 사소한 것들이 들려주는 작은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은 좀 멀리 돌아가야겠다.
와리바시- 일회용이 주는 비장함
<러브레터>와 <철도원>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웬 난데없는 젓가락 장단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일단 일본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이즈’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 얼마 전에 도쿄에 갔을 때, 일본의 청담동격인 비교적 좋은 동네라고 소문난 데서 묵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급 호텔이라는 그곳은 겨우 손바닥만한 방 하나에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고, 그 방의 조립식 목욕탕은 뚱뚱한 사람 절대 사절이라는 팻말을 붙여놓은 것처럼 작았다. 푹신한 의자 하나 없이 영업하는 카페며, 맞은편 사람의 무릎이 닿을 것 같은 지하철. 이게 정말 ‘땅이 작아서’ 생기는 문제일까? ‘땅이 작아서’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것은 뉴욕도 서울도 멕시코시티도 비슷하지만 도쿄의 사이즈에는 유달리 박한 어떤 심리적인 억압과 내부지향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히 듣던 경량화한 일본에 대해 ‘역시’ 했던 필자의 마음은 일본 식당에 와서 경악으로 바뀌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기다리고 있는 일회용 젓가락, 속칭 와리바시라는 이 물건은 한번 쓰고 버리기에는 죄의식을 느낄 만큼 정성스럽게 가공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와리바시의 정갈함은 도쿄 어느 음식점에서도 비슷했다. 문득 소독저라 불리며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우리네의 일회용 젓가락이 생각났다. 와리바시와 소독저. 소독저의 일회용은 한번 쓰면 버린다는 기능성의 일회용이라면, 와리바시의 일회용은 단 한번이라는 절박함이 주는 비장미의 일회성, 그 처녀 같은 일회성을 상실했을 때 몰려드는 허탈감이기도 했다. 딱하고 정확히 두동강나는 와리바시를 뜯으며 드는 생각. ‘이건 할복이야. 할복.’
<철도원> - 와비와 사비의 미학
비장미와 허탈함. 일회성의 미학. 일본은 숫자로 치면 ‘하나’라는 집단주의의 나라가 될 것이다. 태양이 하나이듯 그들의 덴노(천황)도 하나요, 평생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리는 한 <철도원>의 삶이 주는 비장미의 미학도 바로 이러한 영원 같은 하나에서 비롯된다. <철도원>은 눈물샘을 자극하면서 내달리는 일본의 장인정신의 구현이다. 평생 눈 날리는 호로마이역을 지키는 이 사내 오토는 아이가 아파도 아내가 병원에서 죽어가도 기차가 우선이다. 이 대목에 가면 한국 관객들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지극히 일본적인 어떤 것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일본 관객들은 이 완벽주의적인 장인정신에서 나그네길이 주는 어떤 경지와 미학을 발견한다. 그것은 <철도원>을 보러 몰려들었던 450만명이라는 관객 동원의 기록에서 웅변적으로 입증되는 보이지 않는 공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비인간적인 경직이요, 우직함을 가장한 잔인함이다. 아내가 죽어도 기차를 지키는 남편이라니, 그리고 그 말라빠진 대의명분을 말 한마디 없이 감내하는 아내가 어디 인간의 너그러움을 지닌 이들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 지독한 철마 아저씨를 달리게 하는 심리적 연료는 대체 무엇인가?
일단 <철도원>의 오토는 청빈하다. 이러한 오토의 청빈함을 더욱 극명하게 대조시켜주는 사람이 오토와 기관사 견습생 때부터 친구인 스기우라 센이다. 스기우라는 오토와 달리 현장을 떠나 철도부의 관리로 입신했고, 퇴임 뒤에는 스키장에서 일할 만큼 현실적인 인물이다. 같이 스키장에서 여생을 보내자는 스기우라의 염원을 뿌리치고 오토는 끝내 철도라는 현장에 뼈를 묻는다. 게다가 오토는 쓸쓸하고 괴괴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는 딸도 아내도 잃었고, 아들이나 다름없었던 고아 소년 안도도 그의 곁을 떠난다. 이러한 대목은 같은 장인정신의 구현을 모토로 삼는 우리나라 영화 <마부>와는 큰 차이가 있다. 자동차라는 기계 문명에 휩쓸려가는 철도원이나 마부 모두 노을처럼 사라지는 것들이 빚어내는 연민이 가슴을 치지만, 우리의 마부 아저씨는 부잣집 도련님과 결혼하려는 딸과 야심가인 큰아들이 빚어내는 소란스런 삶의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오토는 이러한 삶의 한켠에서 완전히 비켜난 여백 같은 존재이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일본의 일회성과 여백의 미학이 빚어내는 어떤 경지를 이 ‘뽀뽀야’ 아저씨가 온몸으로 구현하고 있음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힘이 빠지고 퇴락한 쓸쓸한 아름다움으로 대표되는 와비와 화려한 과거가 있으나 지금은 보잘것없이 변해버린 영락함이 주는 아쉬움인 사비의 미학과 통하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와비와 사비. 일본인들이 우리네 한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듯 단 한줄의 한국말로 다 담아낼 수 없는 어떤 것. 오토의 청빈함과 적조함이 빚어내는 와비와 사비의 매력은 철도 외에는 자신의 인생 자체를 놓아버린 자의 비애, 그 담담한 체념이 주는 서글픔의 미학일 것이다. 반면 <서편제>로 대표되는 우리의 한의 감정은 오히려 격한 분노와 우울의 간단없는 뒤섞임, 그리고 마음 깊숙한 곳에 가둬둔 이러한 불두덩이를 절창의 소리가락에 담아내는 폭발적인 분출의 역동성에 있다 할 것이다.
<러브레터> - 대상 부재의 미학
재미있게도 <러브레터>와 <철도원>의 포스터는 첫눈에 봐도 아주 비슷한 구석이 있다. <러브레터>의 포스터는 주인공 와타나베 히로코의 얼굴을 큼지막하게 클로즈업한 것이다. 흰눈을 맞으며 허공의 하늘을 응시하는 와타나베의 얼굴에는 흰눈이 송이송이 내리고, 검은 옷의 와타나베와 흰눈이 빚어내는 극명한 대조뿐 아니라 그녀의 청순한 눈길이 주는 그리움이 부드럽게 빛을 발한다. <철도원>의 한컷도 마찬가지이다. 검은 제복의 오토는 하늘을 향해 넋이 나간 듯한 시선을 보내고 그 빈 하늘에는 하염없는 눈만 쏟아진다. 각도와 배경, 의상까지도 거의 유사한 이 두개의 사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철도원>이 감싸안는 와비와 사비의 정서를 <러브레터>는 대상 부재의 그리움과 기억의 주름들로 돌파한다. <러브레터>의 정한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비가, 다시는 돌려질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부재를 극한까지 밀어올린 그리움의 송가이다. 이때의 그리움의 극한은 결국 죽음을 넘어서는 기억이요, 즉물적으로 따지면 결국 그리움의 대상 자체가 없어지는 역설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상 부재의 미학은 일본의 예술과 일상에서 헤아릴 수 없이 반복되는 어떤 심리적 원형의 수준으로까지 이어진다. 예를 들면 중세의 여류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겐지모노가타리(원씨물어)는 일본 고전문학의 최고봉일 뿐 아니라, 일본 미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텍스트이다. 4대 천황 70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친 겐지라는 주인공의 일대기를 그린 이 대하소설은, 일본 회화에도 영향을 끼쳐 이를 소재로 한 수많은 그림이 그려졌다 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11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계속해서 그려진 겐지모노가타리의 그림들은 결국에 가서는 그 주인공들이 약호화하면서 실체가 없어진다는 것. 즉 겐지라는 인물은 사라지고 그 대신 마차가 겐지를 상징한다든가 겐지와 사랑을 나누는 여주인공이 등장할 때는 박꽃이 그려지는 식이다. 대상이 증발되고 남은 그리움의 자리에 자연물이 들어차는 대상 부재의 공간. 결국 억제된 표현이라는 전통적인 일본의 미의식은 감정의 억제뿐 아니라 ‘표현되지 않는 표현’ 자체를 최고로 여기는 어떤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러브레터>의 절창 중 하나는 와타나베 히로코가 연인이 죽은 겨울 산에서 ‘오겡키 데쓰카’(잘 지내세요?)를 부르짖는 장면이 될 것이다. 히로코에게 되돌아오는 메아리는 바로 자연의 맨 얼굴에서 그리움의 정한을 찾는, 그러면서도 하릴없는 대상 부재의 나르시즘에 빠진 일본의 속내를 대표하는 것이리라. 결국 <철도원>과 <러브레터>는 동일한 일본적인 전략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들이다. 사춘기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신세대 감독 이와이 순지와 신파의 정서에 몸을 실은 노장 후루하타 야스오의 조우. 그것은 한국의 관객에게까지 시린 ‘저림’의 감각을 부추기는 전통적인 일본의 미의식에 한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모노노아와레와 시각적 나르시즘의 향연
결국 남는 것은 자연의 맨 얼굴이다. 그것은 생선조차 날것으로 먹는 행위이다. 미국인은 페인트를 칠하고 일본인은 그 페인트칠을 사포로 벗기려는 마음이다. 일본영화를 이해하는 데 자연물이 주는 시각적 나르시즘의 중대성은 <러브레터>와 <철도원> 모두를 구축하고 있는 주춧돌이기도 하다. 모노노아와레의 정서. 우리말로 하면 ‘자연이나 계절의 변화에서 절절히 느껴지는 정서’. 이 모노노아와레를 구현하는 <철도원>과 <러브레터>의 끝은 결국 눈과 벚꽃으로 회귀된다. <철도원>에서 펼쳐지는 지극히 모골이 송연한 어떤 장면을 지켜보자. 젊은 시절을 회상하던 오토는 사내 분규로 기차의 운행이 중단되었던 봄을 기억해낸다. 사내노조로 인해 파업이 단행되자, 오토와 스기우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열차 운행은 지속되어야 한다며 단결이라는 붉은 띠를 머리에 매고 끝까지 열차를 지켜낸다. 이때 흩날리는 벚꽃송이들. 끝내 오토와 스기우라의 주장이 관철되고 이들 극우파(?)는 승리의 환호성을 지른다. 일본식 집단주의와 시각적 나르시즘이 극대화한 이 장면에서 기관사 오토의 짧은 봄을 상징하는 이 벚꽃은 눈과 동일한 시각적인 포장물이다(심지어 오토의 딸의 이름조차 설자(눈의 아이라는 뜻, 유키코)라는 데에야). 일순간 모든 것을 덮어버리지만 짧은 순간 한꺼번에 스러지는 순백의 정한. <러브레터>와 <철도원>는 모두 눈이라는 순결한 이미지를 기억의 공간과 조우하게 만든다. 여기서 눈은 녹아 없어지면 그뿐인 그리움의 기억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산에 묻고 온 와타나베 히로코 역시 눈밭에서 일어날 줄 모른다. <러브레터>의 시작과 끝은 한 소년과 한 소녀가 동시에 중첩된 공간과 시간, 바로 ‘후지이 이츠키’란 이름과 이들을 연결해주는 순백의 기억 즉 눈이다. 이제 히로코의 죽은 연인 후지이 이츠키(남)는 오타루의 또 다른 여성 후지이 이츠키(여)의 기억 속에서 환생한다. 낯선 이로부터 온 편지를 통해 한 여성은 죽은 이가 남긴 소외의 공간을 극복하게 되고, 또 한 여성은 자기 속에 감춰져 있던 기억의 색깔을 되찾게 된다.
거의 투명에 가까운 순백의 정서적 파워
이 모든 전략을 낱낱이 해부함에도 불구하고, 또 일본적인 어떤 것에 참으로 질려 하면서도 끝내 <철도원>에 눈물을 흘리고 치유라는 이름을 단 <러브레터>의 음악이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웬일일까? 많은 일본의 영화들이 <감각의 제국>이 들려주는 공허함 속에 명멸해갔지만, <철도원>이나 <러브레터>만은 그러지 않을 것 같다. 왜냐면 이들이 실어나르는 정서의 강력함이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어떤 것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영화 <쉬리>가 주는 제주도 바닷가의 정한이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그대로 통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리라. <러브레터>의 센티멘털리즘은, <철도원>의 신파는 너무나 깨끗한 거의 투명에 가까운 순백이라 어떤 흠집도 용납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이 남겨놓는 기억은 아주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묶어놓고, 기억을 나누는 일은 살아가는 일의 일부임을, 겹쳐진 시간의 깍지낀 손에서라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그 그리움과 기억의 눈밭에서 사랑을 여읜 사람들은 알리라. 마음속으로조차 불러지지 않는 오래된 이름을. 봄이 두려워 빛을 감춘 겨울의 언저리를 돌았던 발길을.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의 지극한 감성으로 일본의 정서적 파워는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