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만큼이나 영화비평가협회도 많다. 그 중에서도 뉴욕비평가협회를 필두로 하는 5대비평가협회의 권위를 제법 알아주는데, 이들의 평가는 곧잘 아카데미의 평가와 심각한 괴리를 보여주곤 한다. 그 가장 극적인 예가 <LA 컨피덴셜>. 사상 처음으로 5대비평가협회의 작품상을 모조리 휩쓸어간 이 걸작 누아르에 대해서 아카데미는 대단히 인색한 평가를 내렸다. 그 잘난 유치뽕짝 신파극 <타이타닉>(1997)에 상을 몰아준 까닭이다. 그나마 각색상이라도 건진 게 다행이라고 할까? 과연 <LA 컨피덴셜>은 <개 같은 내 인생>(1985), <프라하의 봄>(1988)과 더불어 각색의 최고수준을 보여준다(우리나라에서는 각색을 창작보다 저열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편견. 할리우드에서는 “각색이 창작보다 어렵다”는 것이 공자님 말씀처럼 지당하게 받아들여진 지 이미 오래이며, 따라서 널리 알려진 작품이나 베스트셀러일수록 경험이 풍부한 특급작가에게 맡긴다).
각색의 진가를 확인하려면 원작을 읽어봐야 한다. <LA 컨피덴셜>의 원작인 제임스 엘로이의 ‘LA 범죄소설 3부작’을 펼쳐들면 무엇보다 그 분량에 압도당한다. 전화번호부만한 두께에다가 깨알 같은 활자들이 가득 차 있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만도 수십명을 헤아리는데 사건들은 또 왜 그렇게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지…. 덕분에 그 악마적인 매력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손을 댈 엄두가 나질 않는 작품이다. 그런 연유로 나는 <LA 컨피덴셜>을 보며 세번 놀랐다. 첫째, 이토록 완벽한 각색을 해내다니! 수십명의 캐릭터들을 솎아내고 합쳐 예닐곱명으로 압축하고 거의 창작해내다시피한 새로운 플롯에 맞춰 사건들을 배열한 것은 분명 대가의 솜씨였다. 둘째, 그러나 확인해본 결과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고작해야 나하고 동갑내기일 뿐인 신예작가였다! 셋째, 이 친구의 데뷔작이 공포 영화로서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나이트메어> 시리즈였다!
브라이언 헬겔런드는 특이하게도 선원 출신이다. 고기잡이배를 타고 태평양과 대서양을 쏘다니던 그가 직업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은 엄청난 태풍을 만나 거의 죽다 살아난 24살 때의 일이라고 한다. 이듬해 LA에 정착한 그가 3년 동안 매달려 써낸 첫 작품이 <나이트메어4>. 편안하게 살아온 우리에 대한 복수심리였을까? 한쪽 팔에 칼날을 달고 우리의 꿈속으로 불쑥불쑥 찾아드는 프레디 크루거는 분명 그가 체험했다는 엄청난 태풍보다 더 무섭다. 몽환적이면서도 리얼한 공포가 <나이트메어> 시리즈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이다. 두 번째 작품인 <살인지령 976>은 <나이트메어>에서 프레디 역을 맡았던 배우 로버트 잉글런드에게 메가폰을 잡게 한 호러물. 웬만하면 보지 않는 게 좋다. 끔찍하다. <하이웨이 투 헬>을 끝으로 호러 장르를 벗어난 그는 이제 누아르 장르에 몰입한다.
리처드 도너와 함께 한 두 작품은 꽤 괜찮은 흥행성적을 올렸지만 아무래도 <LA 컨피덴셜>에 비하면 연습게임 정도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늑대와 춤을>(1990)의 영광을 재현하려던 케빈 코스트너의 야심작 <포스트맨>은 “멍청함의 극치”라는 조롱 섞인 악평을 받으며 케빈과 브라이언 두 사람 모두의 얼굴을 깎아먹은 졸작.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천국과 지옥을 오간 브라이언에게 <페이백>은 또다른 기회이자 시련이었다. 그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 <페이백>의 시나리오가 공개되었을 때 할리우드는 다시금 술렁거렸다. 과연 <LA 컨피덴셜>의 작가다운 시나리오라면서 잔뜩 기대감을 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처럼 정통 하드보일드 누아르를 표방했던 <페이백>은 후반부를 넘어서면서 뜬금없이 황당무계한 영웅활극으로 변질된다. 주연 겸 제작을 맡은 멜 깁슨이 촬영 도중 제멋대로 시나리오를 뜯어고쳤기 때문이다.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신인감독 브라이언은 아마도 촬영기간 내내 멜 깁슨을 노려보며 속으로 이런 주문을 외우지 않았을까 싶다. 프레디, 저 친구 좀 어떻게 해줄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