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테헤란 파지르국제영화제, 이슬람 금기에 도전하는 영화들 봇물
2000-02-22
글 :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이란영화는 제2의 혁명

이란영화는 말 그대로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키아로스타미와 마흐말바프로 대변되는 20세기 말의 이란영화가 올해를 기점으로 또 한번의 엄청난 변신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현장을 테헤란에서 지난 2월2일부터 11일까지 열린 파지르국제영화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파지르영화제는 지난 1979년의 이슬람혁명을 기념해 만들어진 영화제로, 국제경쟁 부문과 국내경쟁 부문이 있지만 해외 게스트들에게는 단연 국내경쟁 부문이 관심의 대상이다. 조직위쪽도 이러한 관심을 반영, 해외의 게스트들만 따로 모아 이란영화를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새 천년 이란영화의 새로운 도약을 예고하는 징후는 자파르 파나히가 도발적으로 제기한 사회·정치적 영화의 문제, 놀라운 신인감독들의 등장, 그리고 단편 영화의 눈부신 성장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금기에의 도전: 자파르 파나히의 <순환>

<순환>

이번 영화제 국내경쟁 부문에서 자파르 파나히의 <순환>은 애초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막판에 빠졌으며 게다가 상영금지까지 당했다. 이란영화마켓(Iranian Film Market)의 리셉션이 한창이던 2월9일 저녁, 자파르 파나히의 집에서 그 문제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그 자리에는 로카르노영화제 집행위원장 마르코 뮐러,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 알베르토 바베라, 밴쿠버영화제 집행위원장 알랜 프레니 등 극소수의 게스트만이 초대됐다. 자파르 파나히는 세편의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변신을 도모해왔고, 이번 작품은 그런 면에서 가장 파격적이다. 카메라가 테헤란의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담아나가는 평범한 작품이지만, 그들의 모습은 여태껏 이란영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외손녀를 출산한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어느 어머니의 모습에서 시작된 이 영화는 낙태, 거리의 매춘, 아이의 유기 등 현재 이란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제작자 모하마드 아테바이는 사태의 추이를 좀더 지켜봐야겠다고 했다. 어쩌면 해외영화제 참가조차 불가능할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곧 있을 총선의 결과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여자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병원의 밝은 색깔 문에서 시작하여 갖가지 이유로 이런저런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인 교도소의 어두운 문으로 끝나는 이 영화는 분명 2000년대 이란영화사의 첫머리에 놓일 것이다. 자파르 파나히는 이슬람혁명 뒤 금기에 도전한 최초의 감독이며, 이후의 문제는 여타 감독들이 그의 뒤를 이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자파르 파나히는 부산영화제에 대한 즐거운 추억을 이야기하며 올해도 꼭 참가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이번 영화제에서 중견감독들의 작품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또 한명의 거장인 다리우스 메흐르지 감독의 <믹스>는 영화제작의 뒷배경을 다뤘으나, 지나치게 혼란스러운 구성으로 예전의 정갈함을 잃고 있었다. 또 20년 만에 다시 메가폰을 잡은 바흐만 파르나마라의 <장뇌의 향기, 재스민의 향기> 역시 이번 영화제에서 대상과 감독상을 수상하기는 했으나 지극히 전통적인 양식의 평범한 영화였다. 특히 후자는 파르나마라의 오랜 친구인 키아로스타미의 도움이 수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키아로스타미 그늘 벗어나는 신인들

<개 죽이기>

기대작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다. 즉, 지금 제작되고 있는 작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천국의 아이들>과 <신의 색깔>로 미국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마지드 마지디가 캐나다 자본으로 <비>를 준비중이며, 미래의 거장으로 주목받고 있는 아볼파즐 잘릴리는 일본 자본으로 <달바란>을 제작중이다.

그리고, 주목받는 또다른 두편의 영화가 있다. 먼저 파르나마라처럼 오랫동안 작품을 만들지 못하다가 지난해에 다시 컴백한 바흐람 베이자이의 <개 죽이기>가 있다. 지난 2월12일 늦은 밤시간에 제작자 베흐루즈 하셰미안(그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터키영화 <태양으로의 여행>의 제작자이기도 하다)의 초청으로 촬영현장을 방문했다. 쌀쌀한 날씨 속에서 오랜만에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베이자이의 모습은 열정에 넘쳐 있었다. 오랜 망명생활을 통해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며, 지난 수년간 프랑스로부터 제작의뢰가 쇄도할 정도로 국제적인 지명도를 지닌 그였지만 조국에서 영화를 만들겠다는 그의 열정이 이제야 그를 현장에 불러 세운 것이다. 하셰미안은 이 작품이 베니스영화제를 노리고 있다고 밝혔다. 당연히 올 부산국제영화제의 유력한 초청 후보작이기도 하다.

2월13일 귀국 당일 오전에 파르하드 메흐란파르의 신작 <사랑의 전설>의 가편집본을 볼 수 있었다. 지난해 PPP의 초청 프로젝트였던 이 작품이 이제 드디어 완성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란의 북부 전쟁지역에서 실종된 연인을 찾아나선 한 여인의 여정을 따라가는 이 작품에는 쿠르드족의 아름다운 문화와 풍습이 담겨져 있다. 메흐란파르는 쿠르드족의 전설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또한 일반인들에게 호전적인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 쿠르드족의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생활양식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의 이전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산의 감독’ 메흐란파르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좀더 심화된 통찰력을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이란은 신인감독의 등장이 가장 잦으면서도 가장 쉽게 사라지는 이상한 전통이 있다. 지난 몇년간 내가 주목했던 감독 가운데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는 감독도 상당수에 달한다. 올해도 이러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올해의 신인감독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제 그들이 키아로스타미와 마흐말바프의 그늘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란영화에서 키아로스타미류의 어린이 영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키아로스타미는 이제 더이상 어린이 영화를 만들지 않지만 후배 감독들에게 시나리오를 계속 써주고 있다. 이번에 소개된 모하마드 알리 텔레비의 <버드나무와 바람>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유사한 재미와 정서를 지닌 작품이다. 올해의 신인감독 중 바박 파야니는 단연 발군이다. 그의 데뷔작 <하루 더>는 로베르 브레송과 홍상수를 반쯤 섞어놓은 듯한 영화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늘 만나는 중년의 두남녀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소외와 고독이 절절히 배어나오는 작품이다. 이 밖에 어린이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선배의 작품들과는 달리 거리의 아이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속삭임>의 파브리즈 샤흐바지도 주목의 대상이다.

주목! 단편 영화, 상업 영화의 젖줄

<챠르쇼>

그러나, 21세기 이란영화의 진정한 혁명은 단편영화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것은 최근 단편영화들의 수준이 세계최고급인데다, 장편 극영화의 든든한 젖줄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에서 단편영화는 연간 400여편이 만들어진다. 그것도 거의 16mm이거나 35mm 영화이다. 영화제 기간중 이란영화마켓에 참가한 이란 영시네마 소사이어티(이란에서 가장 중요한 단편 영화 제작 배급하는 회사)의 부스를 찾아 지난 한해 동안 만들어진 단편영화 50여편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었다. 올해는 특히 근래에 보기 드문 우수작을 두편이나 발견할 수 있었다. 이란에서는 이미 스타급 단편영화 감독이지만 국내에는 전혀 소개가 되지 않았던 알리 모하마드 카세미의 신작 <너무 먼>은 매우 충격적인 작품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낙타의 시선을 통해 사막과 오아시스에서의 아름다운 추억, 그리고 인간세계의 잔혹함이 교차되는 이 작품은 그 간결한 형식과 뛰어난 촬영으로 눈이 번쩍 띄는 작품이다. 그리고, 또 한편. 너무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단편이 있다. 여성감독 마흐바시 셰이콜 에스라미의 <차르쇼>가 그것으로, 결혼을 앞둔 소녀가 어머니의 허락으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차르쇼(전통의상)를 입고 신랑을 따라 길을 떠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아름답고도 구성진 민요와 함께 전개되는데,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붉디 붉은 차르쇼를 입은 소녀가 말을 타고 신랑과 함께 만개한 해바라기밭을 지나 길을 떠나는 장면은 나의 뇌리가 아닌 가슴에 박혀버렸다.

올해 이란 단편영화의 약진은 이미 시작되고 있는데, 세계 곳곳의 단편영화제에서 초청이 쇄도하고 있다. 이러한 이란 단편영화의 힘은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과 영화를 사랑하는 이란인들의 열정이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마흐말바프, 영화 만드는 일가족

이제 이 글을 마흐말바프와의 만남으로 마무리지어야겠다. 나는 마흐말바프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그를 만날 때마다 늘 새로운 경이를 느끼곤 했다. 한 인간으로서, 한 감독으로서 그는 늘 나의 가장 이상적인, 아니 때로는 이상을 넘어서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번 만남도 그러했다. 영화제의 마지막 날인 2월11일, 마흐말바프와 점심을 한 뒤 그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또 전화와 팩스번호가 바뀌었다며 새 번호를 알려줬다. 그가 번호를 자주 바꾸는 이유는 물론 이사를 자주 다니기 때문이다. 이사를 자주 다니는 이유는 제작비 문제 때문이다. 그는 지금 맏딸 사미라의 두 번째 작품 <칠판>과 아내 마르지에의 데뷔작을 제작중이다. 두편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자동차(그의 차는 한국산 차다)와 편집기를 팔기로 했다. 사미라의 데뷔작 <사과>를 제작할 때는 집과 차를 팔았었다. 다행히 <사과>가 세계적으로 호평 받고 제작비도 환수가 돼 집과 차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제작비는 해외에서 얼마든지 조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영화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그 어떤 제작비도 받지 않겠다는 게 그 나름의 고집이다.

그리고, 마흐말바프는 온 가족과 함께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통해 자녀들의 교육을 시킨다. 11살 된 막내딸 한나는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영화일을 하고 있다. 지금은 엄마인 마르지에의 작품에서 스크립을 하고 있다. 이 아이는 이미 독학으로 초등학교 졸업자격증을 취득한 상태다. 아들 메이삼은 누나 사미라의 두 번째 작품의 제작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마흐말바프는 자신의 사무실이 곧 학교이며 가정이라고 말한다. 흔히들, ‘영화보다는 삶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마흐말바프에게 있어 삶과 영화는 완전한 동일체, 바로 그것이다.

마르지에는 지금 이란 여성에 관한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이미 그 첫편인 <내가 여자가 되는 날>은 완성됐다. 마흐말바프의 사무실에서 그 작품을 볼 수 있었다. 2월11일, 9살이 되는 소녀 하바는 이제 헤잡을 쓰고 다녀야 한다. 그것은 곧 여성으로서 사회의 구속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바에게는 남자친구인 하산과 아이스크림 사러갈 생각뿐이다. 어머니는 하바에게 한 시간 안으로 돌아와서 헤잡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하바에게는 이제 자유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의 구상은 마르지에가, 그리고 시나리오는 마흐말바프가 썼다. 그리고, 나와 만난 그날 오후 마흐말바프는 촬영이 한창인 키시섬으로 내려갔다. 아내에게 부족한 제작비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점심을 먹으면서 마흐말바프는 이란인들이 즐겨 인용하는 한 구절을 이야기했다. “꽃을 팔아 돈을 벌었다면, 그 돈으로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나는 “당신은 아마 다시 꽃을 사겠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수긍의 미소를 지었다. 그와 헤어지기 전, 마흐말바프는 차를 잠시 세우고 나에게 줄 선물을 하나 사왔다. 그것은 다름아닌 꽃이었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보석이라면, 마흐말바프의 영화는 꽃이라는 나의 생각은 그래서 더욱 확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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