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의 재미, 5%의 교훈.”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의 신조답게, <사무라이 픽션>은 순수한 오락 영화다. 캐릭터들은 만화 같고, 영화의 리듬은 MTV와 일치하며, 영화음악은 록에서 댄스 비트까지 오간다. 히로유키 감독은 평소 일본영화의 ‘천황’ 구로사와 아키라를 흠모한다고 전해진다. 감독은 <사무라이 픽션>에서 일본의 전통 시대극 분위기를 흑백 영상으로 살리되, 철저하게 찰나적 재미를 추구한다. 주인공 헤이지로는 친구의 복수를 다짐하지만, 칼을 다룰 줄도 모른다. 엉뚱하게 돌팔매 연습만 죽어라 한다. 그리고 징징대는 목소리로 “꼭 없애버릴 테다”라고 뇌까린다. 황당함의 견지에서 한편의 만화다.
<사무라이 픽션>은 스타일이 살아 있는 영화다. 이야기 구조엔 별로 신경쓸 필요가 없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지 못해도 웃고 즐길 수 있으니까. 여기서 일본 시대극의 규칙은 무시되거나 아예 비틀린다. 잠복중이던 닌자는 천장에서 몸을 날린 뒤 바닥에 철퍼덕 엎어진다. 사무라이는 남이 시비를 걸면 태연하게 소변을 본다. <사무라이 픽션>은 한편의 ‘사무라이 코미디’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영화에서 감독은 끊임없이 천박한 장난질을 친다. 흑백 영화지만 무사의 액션 장면에선 느닷없이 붉은 색조가 깔리는 식이다. 영상과 음악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것은 영락없는 뮤직비디오 스타일. 무사의 칼놀림은 막춤에 가까울 만큼 가볍고 우스꽝스럽다. 비장한 정조가 이따금 섞여들지만, 그다지 긴 호흡을 유지하진 못한다. 게임 화면처럼, 바로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한다.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은 원래 뮤직비디오 연출자. 호테이 도모야스, 이마이 미키, 미스터 칠드런 등 일본 최고급 음악인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사무라이 픽션>은 그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캐스팅이 화려하진 않지만, 감독은 영화를 찍기 위해 일본의 기발한 엔터테이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음악을 맡은 호테이 도모야스는 주연 가자마쓰리를 맡아 매서운 눈매를 과시하고 있으며, 코미디언이자 영화배우인 후키코시 미쓰루는 헤이지로 역을 맡아 코믹한 면모를 뽐낸다. 그리고 어눌한 닌자 역의 다니 게이는 역시 재즈 음악인이자 코미디언. 감독은 영화에서 기묘한 작명법을 선보인다.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스즈키 (세이준) 등 주요 캐릭터 이름을 일본의 거장 감독들에서 따온 것이다. 일본영화 전통에 대한 의도적인 딴지걸기로 볼 수 있다.
<사무라이 픽션>은 제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수상작. 상영 당시부터 젊은 관객층에게 “엄청나게 웃긴다”라는 평가를 얻었다. 일본 비평계의 반응도 호의적인 편이다. <키네마순보>는 “MTV에서 익힌 영상 기술과 캐스팅의 묘미를 제대로 살려낸 영화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 바치는 재치있는 오마주”라고 평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감독이 전하려는 ‘5%의 교훈’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강함’의 의미가 갖는 시대차일 터이다. <사무라이 픽션>에서 무사 가자마쓰리와 시골 농부 한베이는 대결구도를 형성한다. 무사는 강함을 증명하고 싶어 안달하지만 고수 한베이는 한사코 검을 뽑길 거부한다. 뽑더라도 “미안합니다”라며 고개숙인다. 그리고 결국 시골 농부의 승리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고전 시대극과 달리, 진정 강한 존재는 영웅이 아닌 범인(凡人)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겐 싸움보다 실존의 ‘삶’이 더 중하므로. <사무라이 픽션>은 이같은 교훈을 매우 희화화하고 유희적인 어투로 전하고 있다.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은 “<사무라이 픽션>은 호테이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영화를 보면 이해가 된다. 호테이 토모야스의 감각적이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은 <사무라이 픽션>을 흥겹게 하는 핵심요소다.
주연 겸 영화음악 맡은 호테이 도모야스
기타를 휘두르는 동양의 에릭 세라
<사무라이 픽션>의 주연이자 영화음악을 작곡한 호테이 도모야스는 일본을 대표하는 대중음악 작곡가. 음반 프로듀서이자 록 기타리스트로 활동중이다. ‘발라드의 여왕’ 이마이 미키의 음반을 제작한 경력이 있으며 데이비드 보위와 합동공연을 가진 바 있다. 평소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은 “호테이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칼을 든 사무라이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호테이 도모야스가 영화음악을 작곡한 것은 <사무라이 픽션>이 처음이며 이전에 나카노 히로유키 감독이 그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사무라이 픽션> O.S.T엔 총14곡의 음악이 담겨 있다. 록에서 발라드, 댄스, 프렌치 팝까지 풍부한 장르음악을 빼곡하게 싣는다.
<Main Theme Of SF>는 박력있는 리듬과 효과음, 그리고 오페라 가수의 목소리까지 동원한 테마. 마치 <니키타>와 <제5원소>의 에릭 세라 음악을 동양풍으로 편곡한 인상을 남긴다. <Love Song>은 사랑의 테마. 새소리와 여자의 웃음소리가 효과음으로 삽입되어 있으며 곡 중간에 여성 스캣이 사용된 점이 이채롭다. 호테이 도모야스의 유럽적 감수성이 물씬 묻어나는, 감미로운 곡이다. <Song Of Darkness>는 ‘가자마쓰리의 테마’로 사용된 음악. 평소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는 호테이의 개성이 배어나는데 에릭 클랩턴과 산타나 같은 선배 음악인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Dance with Me>는 활기찬 댄스 음악. 단순명료한 가사와 마치 프랑스의 대중 음악을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경쾌한 소품이다. <사무라이 픽션>에서 ‘튀는’ 장면 중 하나인 여자 ‘오야붕’이 춤추는 장면에 배경으로 깔리는 곡이기도 하다. 이 밖에 호테이 도모야스는 직접 키보드와 기타 연주는 물론이며 일본의 민속악기인 와타이코를 이용해 신비로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