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가이드]
악몽으로 변한 가족여행, 커티스 핸스의 <리버 와일드>
2000-02-15
글 : 홍성남 (평론가)

잘 단련된 스포츠맨과 같은 (육체적·정신적으로) 당당한 여성의 모습은, 예전까지 주로 억압되었으면서도 고상한 메릴 스트립의 ‘심각한’ 표정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꽤나 당혹스러운 것이었을 게다. 그렇지만 동시에 45살이나 먹은 이 중년 여배우가 갑자기 해리슨 포드식의 모험에 도전한 이유를 유추해본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80년대 말을 기점으로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스트립에겐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동기가 어떤 것이든, <리버 와일드>에서의 ‘액션 히어로’ 스트립은 많은 이들로부터 찬탄을 이끌어냈다. 예컨대 <타임>의 리처드 시켈은 그녀를 두고 “페미니즘 노래, 이야기, 전설의 이상적인 여성”이라고까지 말했다. 스트립에게서 가족을 구하기 위해 험한 급류와 싸우는 또 하나의 ‘슈퍼맘’(supermom)의 탄생을 목도했던 것. 비록 <에이리언> 시리즈의 시고니 위버나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린다 해밀턴과 비교하자면 파워면에서 다소 밀리긴 하지만.

<리버 와일드>에서 스트립이 맡은 인물은 예전에 래프팅 가이드였고 지금은 농아들을 가르치는 여성 게일. 아들 로크의 열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녀는 로크와 함께 래프팅 여행을 떠난다. 지독한 일중독자 남편 톰은 나중에서야 어쩔 수 없이 모녀와 합류하게 된다. 로크는 소극적인 아빠 톰보다는 강에서 만난 매력적인 젊은 남자 웨이드에게 더 친밀감을 느낀다. 하지만 도망중인 강도였던 웨이드는 톰을 강에 던져버리고 로크를 인질로 삼아 게일로 하여금 하류로 달아날 수 있게 해달라고 협박한다. 이제 평온할 줄 알았던 가족 여행은 악몽과 같은 인질극으로 변질된다.

커티스 핸슨이 연출을 맡은 액션 스릴러 <리버 와일드>는 존 부어맨의 베스트라 할 수 있는 <서바이벌 게임>(Deliverance, 1972)과 핸슨 자신의 전작 <요람을 흔드는 손>(1992)의 모티브를 섞어 만든 듯한 영화다. 즉 위압적인 대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공황 상태로 돌변한 휴가 이야기와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마수를 뻗치는 침입자의 이야기가 본류로 넘실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공식의 되풀이가 튼실한 플롯을 보장하지는 않는 법.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 전개는 별다른 긴장감을 자아내지 못하는 편이다. 자신을 두고 “다른 종류의 착한 녀석”이라고 말하는 악당 웨이드(케빈 베이컨이 연기하는)의 매혹적이지만 ‘사악한’ 카리스마가 미약한 수준에 머문다는 점은 관객을 팽팽하게 끌어당기지 못하는 또다른 요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오락적 재미란 뻔한 종류의 것이다. 클라이맥스까지 기다려서 거친 급류타기의 스펙터클에 같이 빠져버리는 것. 이 장면은 제법 멋진데, 심지어는 여기까지 오려고 그동안 힘을 ‘비축’한 건가라는 비아냥이 생길 정도다.

충실한 할리우드영화답게 <리버 와일드>는 멀미나는 롤러코스터를 태우고 나서는 가족 화해의 이야기를 던져준다. 이제껏 아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는 개에게서도) 푸대접받던 아버지는 구사일생의 모험 끝에 가족을 중시하는 ‘진짜 아버지’로 거듭난다(그럴까?). 할리우드의 아버지들은 ‘잠정적인’ 화해를 위해서 정말 갖은 고생을 다 겪는다.

감독 커티스 핸슨

서스펜스의 목을 죄며

금주의 TV 영화엔 공교롭게도 커티스 핸슨(1945∼) 감독의 영화가 두편이나 편성되어 있다. 그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LA 컨피덴셜>과 그 바로 전작 <리버 와일드>가 이번주에 전파를 탈 영화들인데, 이 두편의 영화를 비교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될 것 같다. 핸슨 감독은 꽤 탄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심리 스릴러 영화에 일가견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

영화계에 발을 디디기 전 핸슨은 사진작가, 할리우드를 주제로 한 기사들을 쓰는 프리랜서 작가, <시네마>란 잡지의 편집자 등으로 일했다. 많은 영화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핸슨이 영화계에 진출한 것은 시나리오 작가로서였다. 저예산의 심리 스릴러 장르에 대한 기술을 연마하게 해준 그 당시 핸슨의 대표작으로는 인종주의를 맹공한 새뮤얼 풀러 감독의 <마견>(White Dog, 1982)이 있다.

핸슨의 감독 데뷔작은 <달콤한 키스>(1970)였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이창>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이는 <베드룸 윈도>(1987)를 만들면서부터였다. 이어서 그는 계속해서 심리적 서스펜스를 동원하는 스릴러 영화들을 선보이게 되는데, 제목 그대로 ‘악영향’에 대한 영화 <뱃 인플루언스>(1990), 살인적인 유모의 이야기를 그린 <요람을 흔드는 손>(1992) 등이 그런 유의 영화들이다. <LA 컨피덴셜>로 호평을 받은 뒤 핸슨의 최근 작품은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연한 <원더 보이스>(Wonder Bo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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