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8일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열린 제55회 독일영화상 시상식. 총상금이 300만유로에 육박하는, 독일에서 가장 비싼 문화예술상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영화인 2200명이 참석했는데, 그중 가장 바빴던 인물이 유대계 감독인 다니 레비다. 올 초 개봉된 그의 작품 <추커씨에 올인>(Alles auf Zucker)이 16개 “롤라”(트로피 애칭) 중 6개를 싹쓸이하는 바람에 수차례 무대를 오르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스위스 태생으로 1980년 이후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레비 감독의 <추커씨에 올인>은 40년간 의절하고 살아온 극과 극의 유대인 형제 야콥과 사무엘이 어머니의 유언으로 (유산을 노리며)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 마찰과 소동을 겪으며 화해해가는 과정을 그린 코미디. 추커(Zucker)는 설탕을 의미하는 동시에 주인공 야콥 추커만(Zuckermann)이 한때 동독에서 잘 나가는 스포츠 기자 시절 사용하던 예명이기도 하다. 이날 이 작품에 돌아간 롤라는 최고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 의상상, 음악상 등이다.
55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영화상은 올해 엄청난 개혁을 감행했다. 지금까지 종교인, 정치인 등 비영화인으로 구성돼왔던 심사위원단을 올해부터 독일영화아카데미 회원 650명으로 대체한 것이다. 독일영화아카데미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를 모델로 2003년 9월 발족시킨 단체로, 회원들은 모두 영화계 인사들이다. 그러나 영화인들만의 심사는 공정치 못하리라는 우려의 목소리 역시 만만치 않았으니, 독일 영화계를 좌지우지하는 거물들이 자신들이 관련된 작품의 수상을 위해 내부 로비를 벌일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명백한 기우였음이 한방에 증명됐다. 독일 최고의 제작자이자 영화아카데미의 실세인 베른트 아이힝거의 <몰락>이 타이틀 그대로 몰락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최후를 그린 작품으로 국제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오스카상 후보로까지 지명되었던 <몰락>은 연기부문 3개 후보에 간신히 올랐지만, 단 하나의 롤라도 건지지 못했다. 히틀러를 연기한 독일 국민배우 브루노 간츠를 밀치고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추커씨” 헨리 휩센의 소감대로 유대인 가족이 “히틀러를 뭉개버린 것”이다.
최고 작품상과 함께 50만유로의 상금이 주어진 <추커씨에 올인>에 이어 상금 40만유로인 올해의 작품상(실버롤라)은 한스 바인가르트너의 <에쥬케이터>와 마크 로데문트의 <소피 숄-최후의 날>에 돌아갔다. 여우주연상은 올 초 베를린영화제에서 소피 숄을 열연, 은곰상을 수상했던 율리아 옌치, 명예상은 최근 베를린영화아카데미 학장직에서 물러난 라인하르트 하우프 감독에게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