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은 도입부가 매우 겸손하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는 명창 조상현의 <사랑가> 대목이 깔리는 크레딧 시퀀스가 끝난 뒤 화면은 조상현의 판소리 완창 공연이 열리는 어느 극장을 찾아 들어가고 조상현이 소리 공연을 시작하면 영화 <춘향뎐>의 이야기도 펼쳐진다. 조상현의 소리 가락에 따라 판소리 리듬을 온전하게 화면으로 번역해 보여주려는 극중극 구조로, 임권택판 <춘향뎐>의 소박하지만 야심에 찬 미학의 서두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소박하지만 야심에 찬 시도라는 것은 말장난이 아니다. <춘향뎐>은 드라마보다는 조상현의 판소리를 화면전개의 동력으로 삼는 파격을 취했다. 장르개념으로 붙잡기에는 좀 멋쩍은 감이 있지만 판소리판 뮤직비디오로 부를 만한 <춘향뎐>의 신종 장르 형식은 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다. 임권택 감독은 조상현의 판소리를 화면으로 옮겨내면서 조심스럽게 소리와 화면의 이음새를 찾는다. 그것은 보는 사람에게 묘한 긴장감, 아슬아슬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국민감독이라는 어마어마한 칭호를 부여받은 노감독이 판소리 연행예술에 충실한 자세로 영화를 만들다 보니 결과적으로 파격에 가까운 새로운 형식의 꼴을 시험하는 전위를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고수의 손끝이 느껴지는 판소리 뮤직비디오- 뮤지컬
임권택 감독과 촬영을 맡은 정일성, 제작자 이태원과 명창 조상현의 소리까지 <춘향뎐>은 바람직한 전통이라 부를 만한 재능의 이상적인 조합을 꾀하고 있다. <춘향뎐>은 영화와 드라마로 수없이 되풀이해 만들어진 기왕의 <춘향전>과 그다지 인척관계를 맺지 않은 채 다른 단계로 비약해버린다. <춘향전>은 이팔청춘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신분상승의 쾌감을 주는 한국판 신데렐라 이야기를 입힌 다음, 막바지의 ‘암행어사 출두요!’라는 함성이 전해주는, 혹정을 일삼는 지배계층을 공격하는 카타르시스에 이르기까지 이야기의 매력을 고루 갖췄다. 너무 익숙해서 진부한 감이 있지만 <춘향전>이 그토록 수없이 반복 제작된 데는 그만한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임권택판 <춘향전>은 이야기로 승부하지 않는다. 제목을 ‘춘향뎐’으로 지은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는 이야기의 살을 붙이거나 빼고 이야기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는 대신 조상현의 판소리에 줄곧 의지해 화면을 끌고 간다. 경건함마저 느끼게 하는 태도로 판소리 전통을 존중하면서 소리로 화면을 덮으려는 이 영화의 스타일은 온고이지신의 전범이 될 만하다. 판소리를 바탕에 깔고 영화를 진행한다는 발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굉장한 장인의 역량을 필요로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라는 것이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되면 금방 드러난다.
<춘향뎐>은 판소리에 기초한 뮤직비디오 형식을 취했고 가끔 판소리 뮤지컬의 형식을 끌어들인다. 조상현의 <춘향전> 판소리 공연이 2시간 분량의 영화 화면에 대부분 깔리는 것은 뮤직비디오 형식이고 가끔 방자와 월매의 판소리 사설이 대사 대신 깔리는 것은 판소리 뮤지컬 형식이다. 전통 연행 예술의 리듬과 이야기체 영화의 형식은 어떻게 만나는 것인가. 60년대 이후 쌓아온 한국영화 전통을 몸에 넣고 있으며 또 대변하고 있는 임권택 감독의 연출과 정일성의 촬영은 판소리의 매력을 웅변조로 화면에 토해내는 것 같다. <춘향뎐>은 기왕의 어떤 <춘향전> 영화보다 단아하고 화려하면서도 격조있는 화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카메라로 크게 움직이지 않는 듯하면서도 소리의 흥을 전하는 화면의 리듬은 뛰어난 장인만이 해낼 수 있는 고수의 손끝에서 나온 솜씨다. 판소리를 듣는 것이 관객을 끌어들였다가 고무줄을 놓을 때처럼 확 풀어주는 쾌감, 풀어질 때와 조여질 때의 흥겨운 오락가락이라면 그것은 <춘향뎐>이 이뤄낸 화면의 멋이기도 하다.
판소리의 리듬과 어울리는 화면 형상에 모든 것을 거는 <춘향뎐>은 드라마의 운반동력보다 소리의 흥으로 돌파하겠다는 스타일의 야심에 따라 보이는 모든 것들을 소리의 운율에 맞춰 조직해낸다. 이몽룡의 바람에 따라 춘향을 부르러 가는 방자가 흥겨운 판소리 자락에 실어 깡총깡총 뛰어가는 흥겨운 몸짓을 지을 때, 변사또의 명으로 춘향을 잡으러 가는 두 포졸의 행동거지가 소리장단에 맞춰 희극적인 모습을 연출할 때 영화가 건져올릴 수 있는 시청각적 공명효과는 최대치로 이르는 것 같다. 남원의 풍광을 소개하는 서두 단락에 산천초목의 풍경을 잡아내는 장면도 그렇고 춘향을 칠 곤장을 고르는 형리의 모습을 담은 장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임권택 감독 특유의 세밀한 묘사도 연륜이 아니면 다듬을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공감을 끌어낸다. 춘향의 집, 춘향이 갇혀 있는 옥사의 풍경은 인물의 심상을 겉으로 드러내는 듯하고 무엇보다 이몽룡과 성춘향을 축으로 인물 주변에 무심하게 펼쳐진 풍경 묘사는 인위적이되 인위적인 흔적을 벗어난 아름다움의 경지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심미적 추상화, 원전의 격한 감정의 고조는 어디로
<춘향뎐>은 심미적으로 추상화한 결정체를 곧잘 이뤄내지만 그것은 동전의 뒷면처럼 감춰진 그늘도 만들어낸다. 전통연행예술의 위대한 전통에 지나치게 양보하는 자세를 취한 나머지 그만큼 관객이 이야기에서 뭔가 새로 찾아내는 기쁨의 여지는 줄어든다. 이 영화는 대담하고 흥미진진하며 영감이 가득하지만 그것은 시각적으로만 그렇다. 임권택은 무엇이든 격조있게 비추는 장인의 손끝을 지녔다. 그러나 혁신적인 구조에도 불구하고 <춘향전>을 진부한 이야기로 여기는 관객의 선입견을 부술 만한 것은 아니어서 추상적인 아름다움에 몰두한 나머지 뭔가 허전하다. 관객에게 그저 소리의 장단에 감정을 맡기는 자세를 당부하고 있지만 고조되는 소리의 흥만큼이나 이야기의 감흥은 곧잘 살아나지 않는 것이다. 조상현의 완창 판소리를 화면으로 보여주는 식의 ‘극중극’ 구조로 <춘향뎐>이 드라마를 취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 제작진의 판소리에 대한 태도는 거의 계몽주의적인 강박을 드러내고 관객을 애써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도록 타이른다. 도입부에는 판소리 완창을 관람하러 극장에 온 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전통예술이라는 거 보고 후회하는 적이 없더라고…”라는 식의 대화를 친구들과 나누지만 이 장면이 사실은 극중 관찰자의 시점을 취하는 척하면서 관객에게 진지한 관람을 권하는 말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도입부는 이미 판소리에 기꺼이 몸체의 작동원리를 의탁한 <춘향뎐>의 겸양에 찬 미학적 입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면서 이 영화가 스스로 포기한 것도 암시해준다. <춘향뎐>에는 소리의 흥을 시각적으로 세밀하게 옮겨내는 흥이 있지만 <춘향전>의 이야기가 지닌 매력을 극대화하고 세밀히 꾸며내는 흥은 부족하다. 병풍 뒤에서 펼쳐지는 이몽룡과 성춘향의 정사 장면에 카메라가 섣불리 다가가지 않으며 멀리서 지켜보는 시점이 숨막히는 긴장을 언뜻 화면에 배어나게 하는 듯하다가 대범하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고 단호하게 화면에 감정을 새기려는 임권택 고유한 스타일의 예를 보여준다. 그런데도 소리의 리듬에 따라 유장하게 흐르는 영화의 대부분 장면은 장중하고 아름답지만 격하게 가슴을 치는 순간은 기대보다 적다. 이야기의 우물에 인물의 땀과 한숨과 고통과 웃음이 고루 녹아 있는 것 같지 않다.
판소리는 자유분방하게 뛰노는데 <춘향뎐>의 화면은 그것을 존중하느라 정갈하고 지나치게 정돈된 우아한 형식미로 나아간다. 도대체 <춘향전>의 관객의 허를 찌르는 절묘한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반문하게 된다. 임권택판 <춘향뎐>은 그 절묘한 구조를 판소리의 리듬과 흥에서 찾았지만 순수하게 추상화한 아름다움을 통해 감정의 격한 고저를 오가는 원전의 분방한 감정표현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온갖 모순된 표현의 층위들이 꿈틀대며 공존하는 매우 풍부한 감정 교육서인 <춘향전>은 우아하게 양식화한 <춘향뎐>으로 옮겨간 것이다. 원전에서 춘향과 이몽룡은 고상한 격식체로 말을 나누지만 이들은 잠자리에서는 음담패설을 타령조로 희롱하는, 욕망에 솔직한 개구쟁이들이기도 하다. 원전에는 ‘촉루락시민루락, 가성고처원성고’(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도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소리도 높다)는 투의 한시가 깔리는 우아함이 배어 있지만 월매와 방자, 향단의 대화는 걸쭉한 서민의 입담을 담는다. 춘향이 변사또의 수청 요구를 거절하고 일심이라는 글귀를 써 자기 각오를 밝히는 장면에는 비장미가 깔리지만 “‘한’결같이 마음 아직 안 고치겠느냐?” “‘한’ 낭군만 섬기겠다고 일편 단심 맹세한 마음, 변할 리가 있으리오.” “‘이’제도?” “‘이’제도가 어떤 사람이오. 나는 그런 사람 모르오”라는 투의 말장난이 이어지는 장면에선 해학적인 여유도 들어 있다. 또는 죽음을 눈앞에 둔 춘향이 감옥에서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에 찬자리에 생각나는 것이 님뿐이라…”라고 시를 을 때는 <로미오와 줄리엣>에 맞먹는 사랑 감정의 파고가 넘쳐나는 것이다.
완벽한 만듦새, 희귀하고 전례없는 실험
자유연애와 유교적 정절의 모순된 가치관이 수미쌍관으로 맺어지며 기생 딸의 신분상승 욕망과 기생 딸이 양반자제와 맺어지는 신분해체의 꼴을 태연하게 설득시키는 <춘향전>은 조선조 후기의 막 해체되고 변해가는 사회질서를 자유자재로 조롱하면서 서민의 욕망을 대리 만족시켰다. 판소리의 흥은 그 기묘한 어울림을 전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 <춘향뎐>은 조상현 명창의 공연 모습과 그 신기에 가까운 소리에 탄복하는 객석의 모습을 영화 곳곳에 끼워 넣으면서 소리와 화면의 마술적인 어울림에 다다르고자 하는 야심을 스스로 훼손하고 이야기의 상승을 방해하는 따분한 구조를 자초했다. 그러나 시와 음악을 닮고자 정교한 리듬을 짜나가는 사이에 그 많은 당대 사람들의 꿈틀거리고 요동하는 욕망을 녹여낸 드라마를 주조하는 대신 소리의 흥에 맞먹게 순수하게 추상화한, 쉽게 드러나지 않는 내재율의 리듬을 만들어냈다. 이제까지 춘향이 나오는 영화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작품인 <춘향뎐>은 대상의 외관에서 정수를 포착하려고 하는 고전적인 미의 결정체를 끌어내는 장인의 위대한 공력을 통해 잘 빚은 항아리처럼 완벽한 만듦새를 갖췄다. 소리에 화면을 기꺼이 의탁한 이 영화의 미학은 전통예술을 향해 영화의 자리를 겸손하게 낮추고 경배하는 희귀하고 전례가 없는 실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