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마치 오래 사귄 친구의 집 같았다. 물 끓는 주전자, 선반에 즐비한 책과 CD들, 구석마다 놓인 앙증맞은 장난감들. 일상적인 인테리어가 컨셉이라도, 편안함을 그처럼 재연하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안에서 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CD 속지를 확인하고, 책을 펼쳐보고, 소품들을 살펴보던 지진희는 즐거워 보였다. 카메라 앞에서 취하는 배우의 모든 행동이 연기임을 모르지 않지만, 호기심에 빛나는 눈빛까지 거짓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억을 잃고 13살로 돌아갔던 <봄날>의 고은호가 그의 본모습과 아주 가까웠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그가 최근 연기하고 있는 캐릭터는 철없는 만화과 강사 석호(<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엇갈리는 주인공들을 엮어주는 천사 몬티(<퍼햅스 러브>). 한국과 홍콩, 신인감독(이하)과 중견감독(진가신), 블랙코미디와 뮤지컬 등 국적과 규모와 성격이 정반대인 두 영화가 지닌 공통분모는 의외로 큰 것 같다.
<퍼햅스 러브>는 뮤지컬영화를 만드는 감독과 두 주연배우의 삼각관계에 대한 영화다. 나는 뮤지컬에 등장하는 천사이기도 하고, 뮤지컬 밖 세 인물 모두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가서 각자의 과거를 상기시키는 천사 같은 존재다. 진짜 천사날개를 달고 나오는 건 아니다. (웃음) 출연분량은 적지만, 중국말 해야지, 춤추고 노래해야지, 처음엔 안 하려고 했다. 배우는 장학우와 금성무, <와호장룡>의 촬영감독에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프로듀서, 발리우드의 유명한 안무가가 모인 건데, 내가 들어가서 망치는 건 아닌가 싶었으니까. 게다가 원래 유덕화가 하기로 된 역할이었고. 그런데 감독님께서 여지를 많이 두시더라. 몬티에 대해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서 춤과 노래를 뺄 수도 있고, 대사는 내레이션으로 갈 수도 있다고. 몬티가 걸어가면 꽃이 피어나고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영화 속 뮤지컬 장면을 찍었는데, 그냥 애처럼 재밌게 놀면서 찍었다. 감독님께서 바로 그 모습이 몬티인 것 같다고 하더라.
진가신 감독이 지진희를 처음 만난 건, 홍콩 루이 뷔통 매장의 행사장 근처. 지진희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를 밀치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한 무리의 아줌마들 틈에서였다. 평범해 보이는 이 남자 역시, 대만, 홍콩 등지에서 방영된 <대장금> 덕분에 한류라는 거센 바람을 몰고 다니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아마도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인기와 활동반경은, 나이 서른에 연기를 시작하기 이전에는 상상도 못한 상황 아니었을까. 20대의 지진희. 그는 공예에 관한 한 대학공부가 필요없다고 생각했지만, 인생경험을 쌓기 위해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뒤 2년여 동안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누구보다 행복했다. 그리고 이후 다시 사진으로 방향을 돌렸을 땐, 몇백만원짜리 카메라를 사기 위해 미장원 가는 돈을 아끼려고 장발을 고집할 정도였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힘겹게 하나씩 이뤄내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다니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즐겁게 해내는 사람들. 그 매력적인 여유가 다시 스스로를 빛나게 만드는 이들 말이다.
그렇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믿음은 내 위치와 내 실력을 정확히 알아야 생긴다. 내가 열심히 하면 얼마나 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외모, 실력, 하다못해 때에 따라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안경까지도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런 무기를 적재적소에 활용해야 한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인기는 별로, 믿지 않는다. 인기있는 드라마, 3개월이면 잊혀진다. 어차피 대중에겐 매번 새롭게 사랑할 만한 스타가 생기니까. 지금은 사인해달라며 쫓아다니지만, 기껏 사인받은 종이들, 한번 이사가면 다 버릴 거다. 내가 해봐서 안다. (웃음) 팬들에게도 그런다. 난 민정호(<대장금>)도 아니고, 고은호(<봄날>)도 아니며, 당신들이 좋아하게 된 드라마 속 그 어떤 사람도 아니라고. 시간과 정성이 많이 필요한 선물도 제발 하지 말라고 한다. 사실 내 전공이 공예인데, 뭘 그리든 만들든, 내가 그 사람들보다 잘하지 않겠나.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드라마 출연 이후, CF는 쇄도했고, 중화권의 유명 영화인들과 작업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영화 데뷔작인 <H> 이후 3년 만에 선택한 장편영화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다. 지난 6월부터 제천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 영화의 현장은 작고 소박했다.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거장의 현장도 아닌 그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촬영현장 구경이 마냥 신기한 동네 인파들 정도. 더구나 11월 개봉을 목표로 현재까지 촬영을 진행 중인 이 영화의 주인공은 그가 연기하는 만화가 박석규가 아니다. 석규는 그저 미워할 수 없는 여교수, 은숙(문소리)의 주위에 있는 수많은 남자 중 하나다. 물론 발랑 까진 중학생이었던 은숙과 석규가 공유한 엄청난 과거는 극에서 중심이 되는 갈등을 유발하긴 하지만, 과거와 관련해 감정을 분출하는 것도 그의 몫이 아니다. 이하 감독은 신사적이고 부드럽지만 미지근하고 꺼벙해 보이는 그 인물이 자신과 가장 비슷한 캐릭터라고 지목한 바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현장에서도 인터뷰 중에도 지진희는 감독과 자신이 정말 비슷한 사람임을 거듭 강조했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한숨에 읽히는 시나리오였다. 여느 시나리오와 다른 정말 독특함이 느껴지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혼자서 석규의 인생을 그려봤다. 왕날라리였던 형만 아니었으면 석규는 그렇게 나쁜 애가 아니었을 거다. 오히려 석규는 용감하고 현명한 애다. 형은 그 나이 되도록 정신 못 차렸는데, 그래도 석규는 좋아하는 만화로 그 정도 위치에 오른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무엇보다 혈액형이 B형이다. 나도 B형이고. 늘 비슷하게 반듯하다고? 하지만 난 지금 내가 가진 멜로틱한 이미지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코믹배우나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 오히려 변신이 어려운 거다. 강렬함이라는 건,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보여주는 게 진짜다.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생각했다. 이렇게 끝까지 유지하다가 한방을 터뜨려야지, 라고. 이를테면 신구 선생님이 했던 “니들이 게맛을 알아?” 같은. 그 정도의 코미디는,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야 가능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