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동화적인 발상과 환상적인 표현, <철도원>
2000-02-01
글 : 조종국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하얀 눈이 수북이 뒤덮인 산모퉁이를 비집고 달려오던 기차가 요란한 기적소리를 내지른다. 한칸짜리 증기기관차가 힘에 부쳐보이듯, 검은 연기와 기적소리는 이내 흩날리는 눈 속에 스며들고 만다. 기차가 멈춰 선 곳은 홋카이도 지선의 종점인 폐광촌 호로마이역. 하얀 눈과 어울려 낡아 보이긴 하지만 철도원 제복의 맵시가 멋스러운 역장이 어김없이 기차를 맞는다. 호로마이역에 인생을 묻은 철도원 사토 오토마츠다.

오토마츠의 풍모는 촌스러운 시골 역장의 모습이 아니다. 일면 근엄해보이기도 하지만 지그시 보고 있으면 정도 많고 고운 인상이다. 모두들 대처로 떠났지만 호로마이역에 청춘을 묻고 정년퇴임을 맞이하면서도 철도원의 기풍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호감이 간다. 이처럼 자신을 곧추세워온 오토마츠의 인생을 보노라면 짐짓 가슴이 뭉클할 법도 하다.

하지만 이 멜로드라마의 배경에 깔리는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눈감아 주긴 어렵다. 오토마츠에게서는, 전후의 폐허를 딛고 ‘오늘의 일본이 있기까지는 이런 사무치는 아픔을 견디며 멸사봉공한 우리의 아버지들이 있었다’는 웅변이 울려온다. <철도원>으로 일본 열도가 들썩거린 데는 이런 요인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열병을 앓는 두달짜리 딸을 안고 병원에 간 아내가 싸늘한 아이의 시신을 안고 돌아온 날, 역을 지킨 오토마츠는 근무일지에 ‘이상무’라고 썼다. 아내가 죽던 날은 더했다. 아내를 임종하던 동료 부부의 성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호로마이역의 ‘이상없음’을 확인했다. 하루에 몇명 되지 않는 승객들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 유일한 역무원인 역장으로서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오토마츠는 ‘근무지’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관객 아무도 오토마츠를 냉혈한으로 생각하지 않을만치, <철도원>은 감동을 만들어낸다. 출발은 다분히 동화적인 발상과 환상적인 표현이다. 눈덮인 산골마을, 오토마츠와 센의 관계, 커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딸의 등장 등은 이데올로기의 무게보다 감동의 크기를 더한다. 탄광촌 광부들의 싸움을 제외하면 추악하고 일그러진 욕망이나 일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눈치빠른 관객이라면 일찌감치 알아챌 수있지만, 죽은 딸의 혼령이 찾아와 아버지의 그리움을 달래는 설정은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딸이 죽어서 돌아온 날, 오토마츠는 어둠이 내리는 플랫폼에서 먼 산을 향해 호루라기를 불며 속울음을 토해낸다. 아내의 주검을 대하고도 호들갑떨지 않는다. 슬픔을 가슴으로 삭이고 갈무리하는 오토마츠의 고지식함도 감동을 더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딸의 혼령을 만난 오토마츠는 호로마이역이 폐쇄된다는 소식과 함께 플랫폼의 눈 속에 춥고 쓸쓸했던 날들의 가슴저미던 회한을 묻고 세상을 뜬다.

영화 분위기의 수위를 적절하게 끌고 가는, 오토마츠가 시종 흥얼거리는 콧노래 등 영화음악은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음악상을 받은 사카모토 류이치가 만들었고, 환갑에 이른 키무라 오사쿠의 촬영감독이 담아낸 서정적이고 정감어린 영상도 영화의 때깔에 윤기를 더한다.

배우 다카구라 겐

‘철도원’으로 귀환한 일본의 안성기

한국의 안성기쯤에 해당할까. 일본에서 국민배우라면 단연 다카구라 겐(高倉健)일 것이다. 다카구라 겐이란 이름에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연륜과 위력이 담겨 있다. <철도원>을 캐스팅할 때 “다카구라 겐이 출연하기 때문에” 일본연극계 최고의 연기파 여우 나라오카 도모코와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 작곡상을 받았던 사카모토 류이치가 두말없이 참가했다. 인기 코미디언인 시무라 겐도 “동경해왔던 다카구라 겐을 뵐 수 있어서” 조건없이 출연제의에 응했다.

94년 <47인의 자객>을 끝으로 5년간의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철도원>을 계기로 스크린에 컴백하자 40, 50대 이상의, 좀처럼 영화관 출입을 않는 연배의 남녀 다카구라 겐 팬들이 그를 보기 위해 영화관 앞에 줄지어 몰려들어 예술영화로서는 드문 20억엔에 이르는 흥행수입을 가져다주는 데 일조하였다.

영화계 대부로서, 사라져가고 있는 ‘진짜 일본인’의 모델로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다카구라 겐은 1931년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났다. 내년 고희를 앞두고 있는 그의 이미지는 55년 영화사 도에이에 입사하여 56년 <電光空手打찌> 주인공으로 데뷔한 이후 지난 반세기의 영화인생을 통해 쌓아온 것이다. 화려하게 데뷔전을 장식한 그는 이후 도에이 스타로 정력적인 활약을 펼쳐왔다. 58년의 <비상선>과 <숲과 호수의 축제>을 거쳐 8년 동안 이어진 <일본협객전> 시리즈(64∼71년)와 <쇼화잔협전> 시리즈(65∼72년)를 통해 입협 영화의 한 시대를 구축. 일본의 경제적 사회적인 부흥기였던 당시 그는 ‘일본인의 정신, 사무라이’로 고단했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진짜 일본인’의 모델로 확고한 이미지를 확립했다. 이로부터 일본인의 머리 속의 협객의 이미지는 다카구라 겐의 이미지로 굳어져 갔다.

<불타는 전장>(1970) <야쿠자>(1974) <블랙 레인>(1989) 등은 그의 이름을 일본 건너 해외로까지 알리게 했다. 또한 그는 드라마 <형>(1977)과 <치로루의 만가>(1992)를 통해 안방 팬들마저 사로잡아 확고한 국민배우로서의 명성을 구축하게 된다. 그런데 총 202편의 영화를 통해 정력적인 활동을 펼쳐왔던 그가 <47인의 협객> 이후 오랜 침묵에 들어가자 조심스레 은퇴설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런 중 <철도원>은 다카구라 겐의 건재함과 함께 20세기 말 사라져가는 장인정신의 혼으로서 진짜 일본인 다카구라 겐을 새로이 부각시켜 주었다. <철도원>을 통해 다카구라 겐의 영화인생은 새로운 출발을 맞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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