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렛 요한슨은 영화 속 캐릭터의 나이가 정확히 제 나이였던 기억이 별로 없다. 요한슨의 캐릭터들은 요한슨보다 나이가 많았다. 로버트 레드퍼드의 그림 좋은 멜로 <호스 위스퍼러>(1998)에서 반항기 많은 딸로 출연했을 때 요한슨은 열두살이었고 딸 그레이스는 열네살이었다. 괴짜 소녀들의 성장기 <판타스틱 소녀백서>(2000)의 레베카는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딛는, 18살과 19살의 경계에 있었지만 요한슨은 고등학교도 안 들어간 열다섯이었다. 40대 샐러리맨과 20대 주부의 섬세한 정신적 교감을 그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를 찍으며 요한슨은 현실에서보다 먼저 20대를 넘겼다. 그리고 이 영화들로 베니스영화제, 골든글로브, 각종 평론가협회에서 연기상을 수상하거나 한해 두 영화로 더블노미네이션이 됐다.
그녀의 성숙한 언어를 만드는 것은, 벌에 쏘여 부푼 것처럼 도톰하고 관능적인 입술과 풍만하고 어른스러운 몸이 아니라 표현이 풍부한 눈동자다. 그녀는 묘한 녹색 눈동자가 어른거리는 커다란 두눈에 할 말을 채워넣는다. 세상살기가 수월찮아요, 라는 열아홉살의 수심을(<판타스틱 소녀백서>),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당신인가요, 라고 묻는 스물셋 여자의 고독을(<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어떻게 그리셨나요, 라고 묻는 하녀의 당돌한 호기심을(<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요한슨은 눈으로 말한다. 그 눈의 깊이는 그녀가 가진 총명한 생각들에서도 비롯됐을 것이다. 자연스러움과 진정성을 가진 이들을 존경하며 “사람의 영혼을 꿰뚫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요한슨은 부시가 재선운동을 벌이던 지난해 여름, 존 케리와 하워드 딘을 열렬히 지지하며 조지 W. 부시와 딕 체니, 아놀드 슈워제네거 등 보수강경파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요한슨의 어머니는 남편과 이혼한 해부터 딸을 매니지먼트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요한슨은 자기가 원하는 작품을 망설임 없이 고를 수 있었다. 열세살 때부터. 이듬해 개봉한 영화가, 린제이 로한에게 가족코믹물 <패런트 트랩>의 역할을 뺏긴 뒤 선택한 <호스 위스퍼러>다. 요한슨만큼 큰 눈을 가진 린제이 로한은 이후 <퀸카로 살아남는 법> <프리키 프라이데이> 등을 통해 또래 소년들에게 깜찍한 윙크를 날리며 전형적인 할리우드 틴에이지 스타의 길로 향했고, 스칼렛 요한슨은 저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을 그윽히 올려다보는 눈길로 평론가와 감독들의 사랑을 얻었다. 물론 요한슨의 티켓 파워는 린제이 로한보다 훨씬 약하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피터 웨버는 요한슨을 캐스팅하면서 “그런 배우로 어떻게 영화를 팔아먹냐”는 영화사 간부들을 설득하느라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캘빈 클라인이 향수 ‘이터너티’의 새로운 간판으로 내세울 만큼 또래들에게 없는 우아함마저 지닌 요한슨은 케이트 윈슬럿이 포기한 우디 앨런의 신작 <매치포인트>에 출연하면서 “너 앞으로도 돈벌 생각이 없구나”라는 핀잔을 매니저에게 들었다. 이 영화의 촬영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마이클 베이의 <아일랜드> 출연 결정을 내렸다. “여배우를 예쁘장한 치어리더로 만들어서 교내 운동부 킹카와 맺어주는 틴에이지물은 정말 끔찍”한 요한슨이 린제이 로한만큼의 티켓 파워를 갖기 위해 필요한 선택임은 분명하다(린제이 로한의 <프리키 프라이데이>는 북미에서 1억1천만달러의 흥행수익을 거뒀다). 요한슨은 “늘 신중한 선택을 하는” 조디 포스터와 “연기폭이 넓은” 로빈 윌리엄스를 가장 존경한다.
요한슨은 1984년생, 창창한 미래를 눈앞에 둔 스무살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홍보하던 무렵 인터뷰 자리에 ‘헬로 키티’ 베개를 껴안고 나갔던 소녀는 스무살 생일파티를 디즈니랜드에서 열었다. 디즈니랜드! 그녀는 <판타스틱 소녀백서> 촬영현장에서 시간이 나면 친구들과 보드게임을 하며 놀았고,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촬영현장에서는 코폴라 감독 앞에서 트림을 꺼억, 한 다음 깔깔거리며 도망치는 장난을 즐겼다. 또래 소녀들이 가진 생기를 잃어버리지 않은 요한슨은 카메라 앞에만 서면 거짓말처럼 성숙한 여인이 돼버린다. 일찌감치 연기력을 인정받고 우디 앨런의 새로운 뮤즈가 되었고 <아일랜드>와 <미션 임파서블3>라는 블록버스터에까지 이름을 올리게 된 성공비결을 어느 기자가 묻자, 요한슨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요, 새벽 3시만 되면 벌떡 일어나서 매니큐어를 바르거든요. 아무도 그렇게는 못할걸요? 아마도 그게 제 성공비결인 것 같아요.” 장난스럽게 대꾸하던 그녀는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어떤 캐릭터든 제 자신의 일부와 닮은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늘 잊지 않는 점은, 내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어떤 것보다 내 본능이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