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소녀들의 성장담이 추문으로 끝난 까닭, <여고괴담4: 목소리>
2005-07-27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퀴어캠프 미학 속에 보수적인 목소리 숨긴 <여고괴담4: 목소리>

<여고괴담4: 목소리>의 서사, 시각, 소리의 영역에서 눈에 띄는 부재는 남성적 억압이나 체제의 중압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다. 영화에 남자 선생님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존재감은 미미하다. 더구나 주인공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출장 중이고, 입시 지옥체험도 고등학교 2학년, 이 18살 소녀들의 세계에 이상하리만큼 삭제된 채 있다. <여고괴담> 시리즈를 장악하고 있던 낡은 교사의 삐꺽대는 목조 계단 소리도 멈추었다. 교복을 입긴 하지만, 체육복 색깔이 빨간색이라 뭐 새삼스레 억압 운운할 것도 없다. 게다가 환상적 시설을 갖춘 음악실, 잘 돌아가는 방송부, 시체가 위에 얹히기도 한다는 것이 문제지만 곧잘 작동하는 엘리베이터도 있다(다른 학교에도 있긴 하지만 학생들은 사용불가인 경우가 대부분). 빨간 체육복 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이 학교의 소녀들은 한국의 다른 학교 시스템 혹은 교육부로부터 독립된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가장 공들여 만들어내는 장면들 중 몇개가 음악실에서 이뤄지는 노래와 연주 그리고 방송실의 활동이다. 음악실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교류는 여고생들이 상상할 수 있는 작은 유토피아에 가깝다. 대학에서 특별히 음악을 전공하리라는 것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마음껏 노래를 부르고, 늦게까지 연습해도 뭐라는 사람도 없다. 심지어 수위 아저씨도 학생들을 나무라는 대신, 온통 보일러실 걱정뿐이다. 또 여학생들은 라틴어로 된 ‘a sa crum convivium’이나 스페인어의 로망스에 기막힌 화음을 만들어낸다. 학교 분위기는 이러한 활동들을 장려한다. 특별히 예술학교도 특목고도 아닌데 영화에서 학생들이나 우리가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되는 대상은 언어영역이나 수리영역이 아닌 음악과 방송 활동이다. 그리고 이 활동에서 은밀히 교환되거나 노골적으로 분출되는 욕망은 레즈비언 관계나 여자들끼리의 친밀함 그리고 우정이다.

여자들만의 섬, 레스보스

이 학교에서 특히 음악실을 둘러싼 작은 세계는 판타스틱하다. 나머지 세상과 절연된 레스보스처럼 보인다. 여자들이 서로를 사랑과 우정으로 대하며 예술, 문화, 배움을 창궐하게 했다는 섬 말이다. 특히 이 레스보스 섬의 리더인 음악 선생님 희연에게는 여고생들의 소음을 화음으로 금방 변화시키는 재능이 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몇번의 암수술로 노래를 하지 못한다. 바로 그녀의 이러한 불능이 자신을 대신해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는 더블, 대역(학생)을 간절히 부르게 된다. 선생님으로서의 희연은 상위의 목소리를 가지지만, 노래하는 자로서의 희연의 목소리는 그녀의 대역에 종속된다. 하위의 목소리인 것이다. 이렇게 목소리를 둘러싼 위계와 더블, 양면성, 양가성의 문제는 특히 영화 후반 반전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영화는 레스보스 섬일 수도 있었던 이 작은 음악 공동체가 어떻게 파괴되는가를 추적하다 말다 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매우 의아한 구석, 그래서 반동적으로도 읽힐 수 있는 부분이 일단 이런 레스보스 섬을 학교 안에 만들어놓고 그것의 파괴를 온전히 그 안의 소녀들과 여자에게 돌리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애정과 경쟁, 질투 그리고 살의를 추동하는 것은 밖에서 벌이지는 합창대회도 아니고 남자 선생님의 간섭도 아니며, 수능고사를 둘러싼 진학 경쟁도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누구도 바로 자신들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인정이나 인준에 대한 바람도 암시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을 욕망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모 메이어가 수잔 손탁으로부터 되찾아온 ‘퀴어캠프(camp)’의 미학을 공유하는 면이 있다. 또 이 영화엔 사법 권력의 개입도 없다. 심지어 학교에서 시체가 발견되는데도 경찰이 조사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경찰국가인 한국에서 만든 공포영화로 보자면 중요한 허점이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지점은 이 영화가 특정하게 한국의 여고를 배경으로 한 괴담이라기보다는 레스보스, 그 섬을 둘러싼 추문에 가깝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전작이 가졌던 시스템의 억압과 그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서의 여고생들의 관계와는 달리, 일종의 그들 세계의 내부 붕괴, 내파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레스보스 섬을 레즈비언 사이코 킬러들과 여귀들로 채우는 셈이다. 여자들이 집단적으로 나오고 그들의 민감한 상처 부위를 드러내고 있어 이 영화는 얼핏 친소녀적 혹은 친여성적 텍스트처럼도 보이겠지만, 누가 그 상처를 내었으며 또 그 상처를 덧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사실 이 영화 텍스트가 소녀들에게 마련해준 마음자리는 잔혹하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여고라는 폐쇄공간 속에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그 가해자가 다시 피해자가 되는 악순환이 소녀 특유의 성장담, 여성성의 좌절담 혹은 삶과 죽음의 미스터리에 깊이 관계된 것이라기보다 공포영화 장르의 ‘서프라이즈’ 효과를 위한 장치로 읽힌다. 사실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모친 살해(matricide)인데, <분홍신>에서는 분홍신을 두고 딸과 피튀기는 경쟁을 하는 엄마가 나오더니, <여고괴담4: 목소리>에서는 딸과 엄마의 자리가 바뀐 채 일이 벌어진다. 이 영화는 엄마와 딸의 애증관계의 복합성을 그려낸다기보다는 증오를 더 서사의 핵으로 취한다. 거기다가 나이차가 있는 여자와 여자가 관계맺는 것을 상상해 집행하는 방식은, 레즈비언이나 모녀관계로의 환원이지 앎에 함께 다가가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인식론적 쾌락의 공유는 종내 부인된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보수성을 판독하기 어렵게 만들 만큼 영화는 충분히 스마트하다.

여곡성을 만들어낸 미성의 욕망

<여고괴담> 전편들이 여귀 영화라는 한국 영화사의 하위 전통에서 부분적으로 차용한 여자 귀신의 출현 방식, 형상 그 이미지에 공을 들이고 있다면, <여고괴담4: 목소리>는 명백하게 여곡성, 즉 소리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여곡성을 생산하게 된 것이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욕망이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적 구체성을 이루는 소리와 이미지, 서사가 이 영화에서 분리되어 자율적인 영역을 가지고 서로 낯설게 하기 효과를 일으키면서 기존 서사영화의 관행에 도전하고 있다기보다는 각각의 층위가 시간의 경합을 벌이며 이르게 도착하거나 늦게 당도함으로써 다른 배열, 다른 효과를 생산하고 있다. 예컨대 죽은 자를 목소리로 먼저 만나고, 이후 시신을 늦게 확인하고 목도하는 과정이 전개됨으로써 서사 층위에 서스펜스라는 주름이 접히는 것이 그 예다. 그 주름이 접혀 있는 시간 동안 영화 속 선민(서지혜)를 따라, 관객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형체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남은 영언(김옥빈)의 신원확인을 유예한다.

이 시한폭탄 같은 유예는 이 영화의 빛나는 영화적 성취다. 그러나 이 영화가 할 수도 있었으나 하지 않은 낯설게 하기의 예는 샹탈 애커만이나 베티 고르돈와 같은 페미니스트 필름메이커들이 한 작업에서 찾을 수 있다. 샹탈 애커만의 <집으로부터 온 소식>(News from Home,1976)에서 벨기에에 있는 어머니가 뉴욕에 있는 딸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내는 목소리는 한번도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즉“이미지는 후덥지근한 맨해튼을 묘사할 뿐이며, 후자-사운드-는 벨지움이라는 ‘고국’의 국내 상황으로 되돌아오기를 지속적으로 당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분리를 통해 낯설게 하기가 이루어내고 있는 것은 음향과 이미지 그리고 어머니와 딸 사이의 상하개념을 없애는 것이다. -카자 실버만, ‘육체에서 분리된 여성의 목소리’ 픽션영화에서 보이스 오버가 비가시성의 성취, 전지전능함 그리고 담론상의 권력을 입증하는 ‘남성 주체성의 “전형”’이라면 샹탈 애커만은 바로 그러한 관행에 대한 해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여고괴담4: 목소리>에서 여고생들을 지배하는 상위 권력의 다른 ‘남성적’ 목소리는 없지만, 여고생들간의 차이나 여자들간의 차이는 공포를 일으키고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들 사이에 소리 빼앗기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소리와 정체성: 수수께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학생들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EXIT가 영화로 ENTRY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캠프미학 구성의 좋은 예다. 아파트가 밀집한 신흥지대, 조명 밝힌 여학교는 공포 무대의 완벽한 세트다. 다른 공포영화라면 벌써 깜짝장면 하나쯤 나왔을 무렵, 청아한 노래 소리가 음악실에서 들려온다. 영언의 노래다. 선민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녹음한다. 선민은 영언을 응시하고 청취한다. 그들은 단짝 친구다. 노래 연습을 더 하길 바라는 영언을 두고 선민은 학교를 나가고, 영언은 자신의 노래에 누군가가 넣고 있는 화음을 듣는다. 어느덧 귀신이 출몰하고 영언은 프리스비처럼 날아든 악보에 목이 벤 채 죽는다.

이튿날 아침 관객은 영언이 깨어나는 것을 보지만(영화상 이 시퀀스는 첫쨋날로 명명된다) 영화 속의 다른 이들은 그녀를 보지 못하며, 심지어 그녀의 몸을 뚫고 지나가버린다. 영언은 음악 선생님 희연에게 말을 걸지만 희연은 듣지 못한다. 그러나 영언은 선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확인한다. 이 무렵부터 영화에서 소리는 그야말로 다음성적 방향으로 분화하고 축적되고 폭발한다. 다시 여성 주체와 소리와 말의 문제로 돌아가자면,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언어적 특징은 “어린아이와 같은 말투”, “상스러움”,“달콤한 중얼거림”, “어머니와 같은 훈계조” 그리고 “교활한 언어 구사”이며, 그녀의 언어학상 지위는 구술된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녹음테이프와 비슷하다(카자 실버만, 위 논문 재인용). 이것을 인용하는 이유는 나열된 이러한 특징들이야말로 퀴어캠프 미학과 여성주의에 근접해 있는 ‘소리의 정치학‘이 싸움을 걸어야 할 여성에게 부가된 소리를 둘러싼 구질서의 내용과 형식이기 때문이다. 샹탈 애커만이 위에서 어머니의 편지와 딸의 보이스 오버를 등장시킬 때 그것은 유아적 말투나 훈계조와는 거리가 멀다.

<여고괴담4: 목소리>의 영화적 물질들 중에 특권적 위치가 부여된 것은 분명 소리인데, 영화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설정은 녹음테이프를 통해 확인해본 결과 두 소녀의 소리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같은 소리가 다른 소녀들의 육체에 반복적으로 깃드는 것인데, 나는 이 영화가 정말 소리에 실험적 정신을 기울이는 영화라면 이 사실을 ‘발견’만 하고 서둘러 끝내는 대신, 이 지점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 두 소녀는 같은 목소리를 가진 채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는가? 만약 이 영화가 보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들의 차이와 동질성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면,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이들의 성장담을 추문으로 몰고간 것이 과연 누구이고 무엇인가? 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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