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클래식]
이장호 [42] - 꿈에 그리던 대작 영화, <어우동>
2000-02-01
대작 영화를 만들고 싶은 때 <어우동> 제안을 받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중도시각장애자 안요한 목사의 이야기를 다룬 이청준의 실명소설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영화로 만들자는 생각은 화천공사의 박종찬 사장이 먼저 해냈다. 나는 허병섭 목사의 달동네 교회를 다니긴 했으나 아직 예수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때였다. 그러면서도 일요일이면 교회를 두 군데나 나가기 시작했다. 하월곡동의 돌산에 있는 동월교회는 가난한 주민들과 운동권 사람들을 만나 군부 독재 권력을 씹는 재미로, 또 새로 나가기 시작한 안요한 목사의 새빛교회는 매주 뜨거운 감동과 눈물의 역사가 있어서. 다시 말해 나는 신앙보다 교회를 즐겼다고 해야겠다. 정말 앞을 볼 수 없는 맹인들의 찬송가는 들을 때마다 눈물이 앞섰다. 그들이 하는 찬송은 내가 부르는 찬송가처럼 이 생각 저 생각이 안 들어 있어서인지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나만 빼고 철저히 비기독교인들이 만든 영화가 <낮은 데로 임하소서>였다. 연극연출과 창작판소리를 하는 임진택이 각색을 맡았고 주인공은 내 동생 이영호와 그리고 나영희, 신성일, 안성기가 특별 출연을 해주었다. 안요한 목사의 역을 맡은 영호는 그때 실제로 눈이 꽤 나빠져 점점 실명으로 가까이 가고 있을 때였다. 그만큼 실감나는 연기를 어느 누구도 해낼 수 없었던 배역이었다. 그러나 대종상은 8년 전에 받은 신인상을 또 주는 데 그치고 말았다. 전혀 예상 밖으로 나는 감독상을 받았다. 아마도 제작자가 작품상을 받으면서 덤처럼 따라온 콩고물이 감독상이 아니었나 싶다. 대종상을 여러 번 받았지만 언제나 상벌레들의 로비 전투에서 흘린 유실물이거나 아니면 뜻밖의 어부지리였다. 내가 받고 싶은 때, 받고 싶은 작품으로는 단 한번도 없었다.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상에 욕심이 많은 영화감독들이 흔히 갖기 쉬운 허영심 가운데 하나가 대작에 대한 욕심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언젠가는 윌리엄 와일러나 데이비드 린처럼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를 만들고 싶은 꿈을 가졌다. 조감독 때는 스케일이 큰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낸 신상옥 감독의 신필림에서 일을 했으므로 대작을 만드는 일에 아주 익숙하다는 착각을 했다. 수만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고, 수백 마리의 말이 달리고,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세트와 장비, 마차, 대포 등 거대한 대도구들이 마련된다면 나는 얼마든지 대작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쉽게 생각했다. 실제로 연출부 시절에 갑신정변을 소재로 한 <삼일천하 김옥균> <이조여인 잔혹사> <천년호> <내시> 등등 궁중사극이나 시대극에 많이 참여해 나는 대작이 낯설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극에 대한 짙은 향수를 느꼈다. 그런 때에 현진영화사의 김원두 사장이 새로운 제의를 해왔다. <어우동>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가슴아픈 추억들만 남긴 고 김원두 사장은 참으로 기인 중에 기인이었다. 지금 한맥영화사의 김형준 사장의 삼촌인 그가 영화제작사를 처음 만든 것은 바로 김형준 사장의 아버지 김두철씨가 돈을 대줘서 시작한 일이었다. 아마 김원두씨의 성격 때문에 그랬겠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은 대개가 모두 가족처럼 어울렸다. 고 이만희 감독이 그랬고, 시네텔 서울의 전옥숙 사장, 시인 김지하, 시나리오 작가 백결, 영화감독 김호선 심재석 유랑, 기획자이며 제작자인 이황림. 영화 역사 자료 컬렉션으로 유명한 정종화 등등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러리라 여기는데, 나 역시 김원두씨에 대한 추억은 그의 형과 동생 찬두, 또 부산에 계신 여걸 누님 등 가족들과 함께 떠오른다, 그리고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너무 일찍 요절한 막내동생, 등은 원래 소설가였던 김원두씨를 통해 대하소설처럼 익히 들어 마치 고향 사람들처럼 착각이 될 정도다.

아직 내가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하지 못하던 시절인 1978년에, 방위산업으로 크게 자수성가한 형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현진영화사를 설립한 고 김원두 사장은 아직 활동할 수 없는 나에게 거금을 투자해 새로운 영화를 만들자고 제의해 왔다. 오태석 원작의 <환절기>를 <갑자기 불꽃처럼>이란 제목으로 만드는 것인데, 각색은 김승옥, 촬영은 정일성이 맡았다. 그리고 아프리카 케냐에서 현대종합상사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가 조감독으로 뛰어든 배창호, 그는 내가 다시 영화를 만든다고 하니까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영화 <갑자기 불꽃처럼>은 딱 하루 촬영을 했을 뿐, 중앙정보부의 지시로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 문화공보부 김성진 장관은 촬영을 허가했지만 중앙정보부가 제동을 걸었다. 다른 연예인들과 가수들이 아직 묶여서 활동을 하지 못하는데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야말로 영화 제목처럼 갑자기 시작된 일은 ‘갑자기 불꽃처럼’ 중단되고 말았다. 그 일로 김원두 사장은 큰 손해를 보았고 배창호는 다시 영화계를 떠날 수 없어 당분간 김원두 사장의 일을 비서처럼 도왔다. 나는 마침 새로 집을 지을 때여서 그때의 연출료가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어 김원두씨는 정말 나에겐 은인이다. 그가 <어둠의 자식들>이 끝날 무렵 배창호를 감독으로 데뷔시키겠다는 뜻을 비쳤고 또 나에겐 자신이 판권을 갖고 있던 <어우동>을 만들어보라고 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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