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황당무계한 상상 같은 건 좀처럼 하지 않게 되지만 <아일랜드>를 보고 나서 오랜만에 그런 생각을 해봤다. 나의 복제인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넘어서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성까지 부여하게 됐다. 그렇지만 간 빼먹기 위해 토끼를 꼬셔서 용왕님에게 데려가는 별주부처럼 파렴치한 인간으로 보지 마시라. 내가 마신 술로 망가진 나의 간은 내가 감당하겠다는 독립심과 책임감 정도는 있는 인간이다.
<멀티플리시티>에서 이미 다 나온 이야기지만 내가 주인이라면 나는 메릭 박사를 설득해서 복제인간을 데려와 부려먹겠다. 그렇게 해서 한번 짜본 나의 하루 일과. 아침 6시: 복제인간- 운동(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날씬한 몸매!). 나- 잔다. 7시: 복제인간- 느지막이 내가 먹을 7첩반상 아침상을 차린다. 나- 잔다. 8시 출근: 복제인간- 가열차게 기사 마감을 한다. 나- 아직까지 침대에서 뒹굴뒹굴. 12시: 복제인간- 천원짜리 김밥을 점심으로 먹는다(복제인간 주제에 비싼 밥으로 돈을 축낼 수는 없다!). 나- 느긋하게 일어나서 나갈 채비를 한다. 오후 2시: 복제인간- 인터넷 뒤지고 취재원 전화 돌리면서 기사 아이디어 100가지를 준비한다. 나- 느긋하게 시사회에 가서 영화를 본다. 또는 인터뷰를 한다. 단 새끈한 남자배우일 경우만 내가 나가고 나머지는 복제인간에게 맡기지 당근. 오후 4시: 복제인간- 회의에 들어가서 아이디어 안 내는 후배들에게 열받고 아이디어 없다고 갈구는 부장에게 와장창 깨진다(나에게 정말정말 복제인간이 필요한 이유!). 나- 서점, 백화점 등을 순회하며 삶의 질을 개선할 여러 가지 방책을 연구한다. 오후 7시: 복제인간- 집으로 가서 저녁 준비를 한다(퇴근 직후 저녁식사 준비라는 어처구니없는 부인상을 아직도 꿈꾸고 있는 남편의 파렴치한 욕심, 그까이꺼 단방에 해결이다). 나- 술마시러 간다(나에게 복제인간이 필요한 두 번째 이유). 밤 12시: 복제인간- 갖가지 알바를 한다(이제 투덜양도 네 몫이라고 흥). 나- 술 계속 마신다. 밤 2시: 복제인간- 드디어 휴식. 나- 자는 복제인간 깨워 침대에서 바통 터치한다.
써놓고 보니 읽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그런데 <아일랜드>를 비롯한 복제인간 영화들의 문제발생 지점이 그렇듯 몇 가지 오류가 보이는구나. 잘생긴 남자배우를 만나는 따위의 결정적인 순간에 나 아닌 복제인간을 내보내야 하다니. <우주전쟁>을 내가 신나게 보고서 영화도 안 본 복제인간에게 기사를 쓰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술 푸고 새벽 2시에 들어가서는 아침 6시 전에 잠에서 깨서 바통 터치하기가 대단히 힘들 것 같다. 알라스! 무엇보다 코딱지만한 우리집에는 복제인간을 숨겨놓을 만한 공간이 없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 복제인간 만드는 데 필요한 500만달러는커녕 현금 5천달러도 없다. 나의 아름다운 상상이 돈문제에서 결정적으로 좌절하다니, 역시 돈이 원수라는 성현들의 말씀은 틀린 데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