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빠진 세계의 운명은 오직 그의 어깨에 달려 있다. 초반부터 한바탕 실력을 보여준 그는 이제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러 갈 것이다. 아름답고도 이국적이지만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 곳으로. 혼자 가긴 외로울 테니 어딜 가든 파트너가 따라붙는다. 이왕이면 비키니를 입은(완전 누드여선 ‘품위’가 없으니 곤란하다) 팔등신의 미인이면 더 좋겠지. 그렇다고 새로 개발된 무기를 챙겨가지 않는다면 프로가 아닌 법. 그의 앞에는 세계를 집어삼킬 야욕으로 불타는 다분히 천재적인 악당이 기다리고 있다. 모두가 예상하다시피 결국 승리는 그의 차지. 하늘을 찌르는 폭발을 뒤로하고 그는 새 파트너와 함께 유유히 악당의 숨겨진 요새를 벗어나온다. 마지막으로 사랑스런 파트너와의 파티타임. 그런데 이 소중한 시간에 ‘M’이란 작자는 눈치도 없이 웬 전화질이람.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맞춰보라는 건 퀴즈 축에도 못 든다. 영화나 소설을 봤건 안 봤건, 또는 그것들을 높이 평가하든 아니든, 어쨌든 제임스 본드는 20세기 대중문화의 유명 인사들 가운데 하나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움베르토 에코가 이안 플레밍(‘007’ 시리즈의 원작자)의 이야기들은 축구 경기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듯이, 그런 일종의 공식(formula)적인 성격 때문에라도 본드는 자신만의 독특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위 공식에 몇몇 변수들만을 갈아끼우면 그게 바로 007 시리즈의 다른 하나의 버전이 나온다.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는 007 시리즈의 아홉 번째 영화이면서 <007 죽느냐 사느냐>에 이은 로저 무어의 두 번째 제임스 본드 출연작이다. 감독은 <007 골드 핑거>(1964)를 비롯, 모두 네편의 본드 영화를 연출한 가이 해밀턴.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본드가 무찔러야 할 악당은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스카라망가. 강력한 체력과 정력의 상징으로서 특이하게도 세개의 젖꼭지를 가지고 있는 그는 태양 에너지를 독점함으로써 세계를 자기 손아귀에 넣어보려는 헛된 꿈을 가지고 있다. 그와 맞서야 한다는 당연한 임무를 완수하러 본드는 홍콩, 타이, 중국 등 동양권으로 진출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엔 그에게 별난 신무기가 주어지지 않는다(스카라망가의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유일한 ‘신제품’인가 보다). 그만큼 본드의 고투가 이어질까, 아니면 스펙터클이 줄어든 것일까?
로저 무어는 제임스 본드 이야기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단지 굉장한 만화일 뿐이다.” 하지만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는 시리즈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도 액션의 만화적인 재미가 좀 처지는 편이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상이하긴 하겠지만, 평자들은 <007 뷰 투 어 킬>(1985)과 함께 이 영화를 시리즈 가운데 가장 뒤떨어지는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본드와 스카라망가가 권총을 들고 ‘가장 신사다운 방법’으로 고전적인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꽤 흥미로운 편이다. 이 둘이 미로와 같은 도깨비집에서 벌이는 생사의 결투는 마치 <상하이에서 온 여인>이나 <용쟁호투>의 마지막 장면을 패러디한 듯한 느낌을 준다. 스카라망가의 난쟁이 심복 닉낵이 본드와 티격태격 싸우는 장면도 <오스틴 파워>에서 미니미와 오스틴의 싸움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
배우 로저 무어
원작자 추천인물
로저 무어(1928∼)는 무엇보다도 숀 코너리, 조지 레젠비에 이은 3대 ‘제임스 본드’로 잘 알려진 배우다.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한 매력을 풍기는 그의 본드 캐릭터는 종종 숀 코너리의 그것과 비교되곤 한다. 즉 숀 코너리가 마치 거친 깡패와 같은 야성적인 매력을 발산했다면, 로저 무어는 신사와 같은 세련됨을 앞세웠다는 것. 로저 무어는 007 시리즈의 원작자인 이안 플레밍이 강력하게 추천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로저 무어가 본드 역을 맡으면서 시리즈에 잔재미를 주는 소도구나 오밀조밀한 장치들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다는 것. <007 죽느냐 사느냐>(1973)에 처음 본드로 등장했을 때 이미 그의 나이가 45살이나 되었기 때문에 육체를 적극 활용한 액션은 아예 기대할 수 없었다는 후문.
1928년 런던에서 경찰관의 외아들로 태어난 로저 무어는 원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림 그리기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영화 엑스트라 일을 했던 그는 곧 연기에 흥미를 느끼고서는 왕립 극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뚱뚱하다고 놀림을 받았던 그였지만, 자라면서 핸섬한 용모를 갖추게 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54년 MGM과 계약을 맺었다. 리처드 브룩스 감독의 <내가 마지막 본 파리>(1954)가 영화 데뷔작. 하지만 그가 배우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영국에서 만든 일련의 TV 시리즈들이 히트를 치면서부터. <아이반호>(1957) <성인>(1963∼68) <설득자들>(1971)이 그 작품들. 제임스 본드 시리즈 외에도 로저 무어는 <골드>(1974) <바다의 늑대들>(1980) <캐논 볼>(1981) 등 주로 모험, 액션, 전쟁 영화에 자주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