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은 음악이 넘치는 영화가 결코 아니다. 7개 장으로 나뉘는 영화의 구성에 맞춰 장과 장 사이를 이어주는 기차 인서트는 음악이 적셔주지만, 20년을 거슬러가는 그 지난한 여정을 따라가는 선율은 마치 마른 침을 삼킬 때처럼 조금씩, 애타게 귓전으로 흘러온다. 감정이 넘치기보다는 별 과장없이 일상의 흐름을 세심하게 옮겨내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특히 순수를 찾아가는 <박하사탕>의 힘겨운 여행 속에 음악의 자리는 유난히 더 조심스럽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밝지도 어둡지도 않게. 관객이 영호의 삶을 중립적으로 바라봤으면 하고 만들었다는 <박하사탕>의 음악은 데뷔작임을 감안하지 않아도 별 손색이 없다. 정작 영화음악가로 첫 단추를 끼운 이재진(30)씨는 <박하사탕>에 대해 할말이 없다고, 잘 모르겠다며 웃지만.
영화음악은 처음이지만, 사는 방향이 음악으로 정해진 지는 꽤 됐다. ‘소리로 크는 나무’. 어릴 때부터 식물에 관심이 많아 89학번으로 생물학과에 입학하면서 얼떨결에 가입한 음악동아리다. 공연하는 줄 알고 보러 갔다가 알고 보니 오디션이어서 얼결에 노래하고 붙어버렸다. 그 전에도 기타치면서 해바라기, 동물원 노래를 열심히 부르곤 했지만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운 것은 그때부터다. 가창과 연주, 창작 중 가창을 택했는데, 가끔 악보도 못 그리면서 떠오르는 음들을 코드로 적어 선배한테 보여주곤 했다. 그때 매일 곡 써서 가져오라며 봐준 선배가 지금 <박하사탕>의 변승욱 조감독이다. 일단 직접 작사, 작곡을 하면서부터는 다른 사람의 가사로 곡을 써본 적이 없다. “음악은 솔직해야 하고, 내 작은 느낌을 전할 수 있는 노래”를 바랐기 때문. 그래서 <아 대한민국>처럼 수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노래는 지금도 자신이 없다.
그렇게 음악에 새록새록 빠져들다가 4학년이 돼서야 겨우 떠밀려간 군대생활은, 훈련소 나팔소리까지 좋을 만큼 음악 중독이어서 버티는 게 여간 고되지 않았다. 제대 뒤 95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자작곡으로 은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졸업을 맞았다. 그때 먼저 미국 유학을 떠나 있던 변 감독은 버클리음대 유학을 권했지만, 모든 게 막연하고 음악을 계속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서던 시기였다. 싱어송라이터로 승부해볼 생각도 없진 않았지만 작곡도 힘들고, 음반기획사를 찾아갔다가 음악은 좋은데 대표곡, 빠른 댄스곡이 없다는 점잖은 거절도 당했다. 전공을 살릴 수도 있었겠지만 못내 음악에 미련이 남았다. 결국 맘먹고 버클리 유학길에 오르면서 음악하는 사람을 돕는 프로듀서가 되자 싶었는데, 그것도 가수, 곡이 안 좋으면 제 음악에 미련이 많을 것 같아 창작의 초심을 다졌다.
진솔한 가사를 바라는 욕심에 늘 작사에 고생인 그에게 버클리 교수는 영화음악을 추천했다. 마침 컬럼비아대학에 있던 민인기 감독의 단편 영화에 음악을 해보고 나름의 재미를 찾아갈 무렵, 변승욱 조감독의 전화를 받았다. 99년 1월1일이었다. <박하사탕> 영화음악 제의를 받고 그는 타워레코드에 가서 비디오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영화와 음악을 보고 들으면서 사모은 게 지금은 150여편. 그러곤 시나리오를 받아 들고 첫 데모를 만들어서 특급우편으로 보냈다. 그로서는 이르러 보지 않은 나이에서 순수를 찾아가는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는 데 연민이 필요했다. 학교 수업과 병행하느라 고단하게 작업한 끝에, 세 번째 데모를 만들고 5월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가장 어려웠던 작업은 ‘경아의 옥탑방’. 하루 만에 해오라는 걸 이틀은 달라고 우겨서 밤 11시에 촬영장인 제천에 갔다가 새벽 4시에 서울로 와서 연주자를 섭외하고, 꼬박 밤을 새워 녹음했다. 그래도 ‘가슴으로 해달라’는 말과 함께 재주문이 들어온 게 그 선율이었다. 5월달에 들어와서 OK를 받은 9월 말까지, 선금 돌려주고 가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부지기수. “앞으로도 이것만큼 힘든 작품은 없을 것 같다”고 말하지만 첫 단추를 너무 잘 끼운 것 같아 뿌듯하고 다음에 뭘 할지 걱정스럽다. 일단은 1월 중순에 출국해 버클리의 남은 학기를 마치고 돌아올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