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작품수, 열정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주노명 베이커리>의 이미연
2000-01-25
글 : 박은영
사진 : 정진환

전화를 끼고 앉은 이미연, 맘에도 없는 ‘보험 가입’을 미끼로 보험설계사와 통화중이다. 시시콜콜 질문을 던지고 반응을 살펴가면서. 복장 체크도 해본다. 굽 낮은 구두, 큼지막한 가방, 무릎길이 치마, 오케이. 저녁시간에 TV를 보면서는, 남편 김승우를 고문한다. “보험 들겠다는 남자가 ‘당신 구두를 닦아주고 싶다’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면, 다시 만났을 때 그 보험설계사, 기분이 어떨까?” 그 비슷한 질문만 벌써 열두 번째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영화 얘기가 야속한 남편은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묵묵부답. <주노명 베이커리>를 찍던 무렵, 이미연의 어떤 하루다.

다 써먹을 수 없을 게 뻔한데,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가 있느냐는 걱정을 들을 때마다, 이미연은 “다른 생각이 안 나는데 어쩌냐”고 되묻곤 했단다. 사랑의 화살이 엇갈려 꽂히는 두쌍의 부부 이야기를 만나고, 3류 소설가를 남편으로 둔 보험설계사 해숙을 만나면서,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더라는 것이다. “생활력 강하다는 것도 맘에 들었고, 여자이기 때문에 사랑을 꿈꿀 수 있다”는 설정도 맘에 들었다고. 헛고생으로 끝나더라도, 준비하는 과정만으로 연기가 달라질 거라 믿었고, “다른 누가 했어도 괜찮겠다”는 얘기를 듣기 싫었다. 그 때문일까. 빵집 여자에게 넋이 나가 먹지도 않을 빵을 사들이는 남편을 인정사정 없이 때려대는 억센 외양부터, 낭만적인 빵집 남자의 가을비 같은 사랑에 젖어버리는 여린 마음까지, 간단치 않은 인간 해숙의 자리에 이미연 아닌 다른 배우를 대입하긴 힘들다. “‘도’를 예상했지만 ‘솔’을 내야 하는” 식으로, 생각과 다른 영화가 돼버렸지만, 개봉날 같이들 술 한잔 하면서 그런 아쉬움과 후회는 날려버렸다고.

“제가 한때 청순가련의 대명사였잖아요.” 이미연의 입가에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슬쩍 스친다. 이제 세상이, 그리고 자신이 달라졌음을 그도 아는 것이다. 10년 전 뭇 남성을 함락시킨 긴 생머리와 수줍은 미소의 그에게, 이제는 솔직담백하다거나 '에너제틱'하다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화끈한 미시’로 통하기도 한다. 세월을 탄 것일까 싶기도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보고 싶은 것만을 확대해 보는 대중의 돋보기가 조금씩 위치 이동하고 있다는 것. “완벽하게 감추지 않는 이상, 배우의 이미지는 작품마다 바뀌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고 있다. 얼마 전 송지나 작가의 5번째 프로포즈를 받아 <러브 스토리> 에피소드 ‘오픈 엔디드’를 찍었다. 시한부 삶을 조용히 정리하는 조각가 역할을 맡았는데, 작품이 끝나고 많이 앓았다. <러브 스토리>로 섬세한 내면연기에 자신감이 붙어, 이제는 잔잔한 사랑 얘기에 도전하고 싶어진다고. “지금 마음이 그래요. ‘사랑은 순간적인 영혼의 만남’이라는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네요.”

이미연은 그리고 ‘열정’을 이야기했다. 아이돌 스타로 등극해 스스로 천재라 믿던 시절, 그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던 단어다. 이른 결혼 뒤에 원치 않는 공백기를 가지면서, 연기에 대한 감이 생기고, 또 연기가 절실해지기 시작한 것.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후로 ‘자칭타칭’ 배우로 거듭났다고 기억한다. 지금은 ‘유부녀 배우’의 핸디캡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지만, 작품을 만나는 ‘경우의 수’가 “내 열정에 비기면 턱없이 적다”고 잘라 말한다. 지난해 <여고괴담>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을 때도 “조연으로서 참여한 게 아니다. 영화에 대한 내 열정과 애정이 식어버리길 바라냐”고 항변하고 싶을 만큼 섭섭했다고. 참여하는 맘은 다 같은데, 주연이나 조연으로 ‘급’을 나누고 평가를 달리 하는 현실이 아쉬웠던 모양이다. 당황스러울 만큼 명쾌하고 화끈한 인터뷰 말미에, 스튜디오의 조명 하나가 과열로 터져버렸다. 우연이었을까.

의상협찬 인베이스 박지원 니켄니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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