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충무로에는 30대 여성의 로맨스가 만개하고 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30대 여성의 로맨스는 가족제도에 대한 도전이거나 일탈(<해피엔드> <정사>), 또는 떠나 보내야 할 추억(<봄날은 간다>)으로 그려져왔다. 그러나 최근 충무로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로맨스 영화에서 30대 여성은 ‘뽀샤시’한 청춘 로맨스의 필터를 거둔 스스럼없는 30대의 목소리로 자신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20대는 사랑, 30대는 불륜? 김지수·전도연·문소리…
질감 다른 풍부함으로 고루한 공식 깨뜨리기
김지수, 조재현 주연의 <로망스>(문승욱 감독·엘제이 필름), 전도연, 황정민 주연의 <너는 내 운명>(박진표 감독· 영화사 봄), 송윤아, 설경구 주연의 <사랑을 놓치다>(추창민 감독·시네마서비스), 김정은 주연의 <사랑니>(정지우 감독·시네마서비스), 문소리 주연의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이하 감독·엠케이픽처스, 엔젤언더그라운드) 등 현재 촬영 또는 후반작업 중인 작품들은 각기 다른 스토리와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만 30대 멜로드라마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여배우, 영화와 함께 나이들다=위의 영화들은 ‘여배우는 나이들지만 로맨스의 여주인공은 나이들지 않는다’는 충무로의 오랜 불문율을 깼다. 출연 여배우들은 모두 30대의 자기 또래를 연기하면서 사랑에 몸을 던진다. ‘생애 단 한번뿐인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뜨거운 로맨스를 그리는 <로망스>는 가정에 억눌린 기혼여성과 미혼남성의 러브스토리지만 방점은 ‘일탈’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 문승욱 감독이 30대의 로맨스를 구상하게 된 이유는 “30대가 가지는 삶의 무게” 때문이다. “30대는 짐도 책임도 많아지는 나이다. 사랑을 위해서 그걸 벗어나려고 할 때 다가오는 위기나 결과는 훨씬 드라마틱하고 그래서 전체적인 이야기가 화려해진다”는게 문 감독이 꼽는 30대 멜로드라마의 매력이다.
성숙한 여배우의 존재감도 30대 멜로드라마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문 감독은 극 중 부잣집 며느리인 김지수씨가 드레스를 입었을 때 “아름다움의 느낌이 정말 다르더라”는 이야기를 한다. “배우 스스로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나이와 경험으로 쌓인 여성성은 20대 여배우의 순정만화적 사랑스러움과는 질감이 다르다”는 말이다. 서른일곱 노총각과 서른살 다방 아가씨의 절절한 사랑을 그리는 <너는 내 운명>의 박진표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전도연 외에 다른 배우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이를 염두한 게 아니라 전도연의 놀라울만큼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과 신뢰할만한 연기력이 그 이유”로 삼십대에 들어선 배우 전도연의 연기적 성숙이 이 영화의 큰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30대 여배우, 배우 이상의 파트너= 불량청소년에서 지방대 교수로 성장한 여성의 기묘한 남성편력과 사랑찾기를 그린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의 오가원 프로듀서는 “주연배우인 문소리씨가 없었다면 모호한 주인공 캐릭터를 잡아가는 데 애를 먹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보통 배우는 자기 캐릭터에만 몰두하기 쉬운데 문소리는 감독이나 제작자가 자칫 놓칠 수 있는 캐릭터와 드라마의 맥락까지 짚어준다. 문소리 개인이 걸어온 독특한 배우이력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감독과 촬영할 장면 등을 논의할 때 소리씨 자신이 3,4년 전 같으면 이런 생각까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배우의 성숙도가 작품에 끼치는 영향은 단순한 연기적 완성도 이상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비단 로맨스가 아니라도 풍부한 연기이력을 가진 여배우는 여성 드라마에서 배우 이상의 역할을 한다. <분홍신>을 연출한 김용균 감독은 “주인공 선재 캐릭터의 상당 부분은 김혜수씨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으로 여성 영화를 남자감독이 찍을 때 든든한 여배우와 일하는 것은 감독·배우 관계라기 보다 동반자적인 느낌이 훨씬 크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여배우, 여성 관객과 함께 나이들다=영화평론가 주유신 교수(중앙대)는 30대 여성 멜로의 만개에 대해 “<엽기적인 그녀> 같은 인터넷 소설류의 경쾌한 로맨스와 <싱글즈> 같은 20대 후반 여성들의 결혼에 대한 강박이나 고민이 시효를 다한 충무로의 새로운 소재찾기와 연애가 더 이상 20대의 전유물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나 지나치게 가볍거나 무겁지 않고 현실감있는 30대 멜로 드라마의 제작붐을 가져온 듯하다”고 진단했다. 결혼 적령기가 30대를 훌쩍 넘고 또 결혼 유무를 떠나 30대 여성의 사회활동이 많아지면서 더 이상 ‘20대가 하면 로맨스, 30대가 하면 불륜’ 이라는 고루한 공식이 사라지고 영화는 자연스럽게 여성의 현실을 반영하게 된 것이다. 20대 때 처음 만났던 커플이 30대에 사랑을 확인한다는 <사랑을 놓치다>나 열일곱살의 소년과 사랑에 빠지는 서른살 여성을 담은 <사랑니> 등에서 30대의 평범한 직장인 여성의 일상이 섬세하게 묘사되는 건 사랑이 실제 30대 여성의 삶 안으로 성큼 들어온 현실에 대한 ‘생활의 발견’인 셈이다.
“주름 늘었지만 원숙미도 늘었죠”
<슬픔이여 안녕>의 오연수
탤런트 오연수씨. 34살이다. 1990년 문화방송의 <춤추는 가얏고>로 첫 선을 보였으니 브라운관에 둥지 튼 지 정확히 15년째다. 일반 회사로 친다면 부장급 탤런트인 셈이다. 데뷔 이후 지난 10여년이 한결 같았다. ‘무난한 연기자’란 딱지가 곧잘 붙은 이유다. 특별히 인기를 휩쓸었다, 딱히 슬럼프를 겪었다, 가 없었다. 그다지 마뜩잖은 일이다. 연극 무대에서 여성 배우의 ‘25살은 15살’이지만, 브라운관에서 25살은 30대에 가깝다. 꼭지점이자 30대로 기운 내리막의 시작으로 보는 방송계의 묘한 생리탓이다. 1998년 결혼한 그에게는 더 엄격하다.
“결혼하면 20대 역은커녕 노처녀 역을 맡는 것조차 이상하게 간주해요. 배우 오연수가 아닌 개인, 특히 결혼한 오연수로 보는 거죠.” 임신한 몸을 사진에 담기도 한 데미 무어가 다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는 미국과는 딴판이다.
하지만 이는 지난 10여년에 어울리는 설명일 뿐. 오연수씨는 정작 30대부터 전에 견줄 수 없는 인기몰이 중이다. 결혼한 뒤 배역이 제한되는 관례는 여전하지만, 제 나이와 배역의 나이가 일치해가면서 그는 늦가을 감처럼 익고있다.
질주는 2002년작 <거침없는 사랑>(팬들은 ‘거사’라고 부른다)에서 시작한다. 그가 연기한 31살의 경주는 말하자면 삼순이의 원조다. “결혼하자”던 남자친구가 경주 회사 동료와 눈 맞아 결혼한다. 31살, 노처녀 경주로 감가상각되는 순간이다. 솔직하고 억세다. 수 틀리면 술병도 깬다. 더 삼순스럽고 더 현실적이다. 이혼남 정환과 티격태격 일구는 사랑이 그렇다. 30대가 40대보다 20대에 더 가까워진 계기가 된다. 그러나 결과만 보면 최악의 시청률(2%)를 기록한 작품이다. “월드컵과 붙었거든요, 누가 드라마를 보겠어요?” 웃는다. “성취감을 느끼는 드라마”란 설명에는 30대 오연수의 여유와 자신감이 묻어있다. 20대였다면 어땠을까.
“30대 배우들, 이모나 누나를 주로 했던 게 오래전 일이 아니잖아요. 트렌드 드라마가 지겨워지면서 드라마 소재도 다양해졌어요. <두번째 프로포즈>의 장미영처럼 20대가 표현 못할 배역도 많아졌죠. 시청자들의 시각도 그만큼 더 넓어졌고요.” 여기에 요즘 30대 배우들의 자기관리와 노력을 얹진다. 프라임타임 시청권을 빼앗아온 주부, 주변부로 내몰리지 않으려는 30대 ‘커리어아줌마’의 것처럼. 오연수씨는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오면 두 아들을 잊는다.
<두번째 프로포즈>(2004년)야말로 ‘미시 드라마’의 물꼬를 튼 작품이다. <불량주부> 등이 뒤를 이었다. 시청률 40%를 웃돌았다. 아줌마조차 예쁘게 꾸며댔던 관례를 깼다. 이혼당한 장미영(오연수)이 감자탕집 주인으로 재기하기까지, 장미영도 아줌마 오연수도 꾸밈 없었다. 거짓말같지만 정말 자다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인채 연기했다.
“결혼하고, 특히 아이를 갖고서 훨씬 성숙하고 여유로워졌어요. 두려움도 줄고요. 예전엔 표현을 잘 하지 않았는데 이젠 굳이 숨기지 않아요.” 주름이 늘었다는 사진기자의 귓속말을 들었는지 “주름은 늘지만, 원숙미도 늘어나겠죠. 여자로서, 배우로서도 30대가 꽃이라는 말, 실감합니다”는 그. “속 깊은 로맨스부터 배추파는 아줌마까지 할 수 있는 게 바로 30대 배우”라며 방점 찍는다. 지금 <슬픔이여 안녕>에서 30대 중반 노처녀로 열연 중이다.
글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