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가이드]
30대 여배우들 안방극장 점령
2005-08-04
글 : 김진철 (한겨레 기자)
‘조연의 벽’ 허문 언니들의 내공이여

30대 여자 배우들이 브라운관을 점령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어느새 이들의 독무대가 돼버렸다. 지난해 기미가 보이기 시작해 올해 눈에 띠게 두드러졌다. 티브이 드라마 주인공 가운데 20대 여성 연기자들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파릇파릇하던 20대에 단방에 떴다가 결혼이나 추문으로 홀연히 사라지던 일이 이젠 거의 없다. 결혼·출산·육아 뒤 다시 출연하면서 전처럼 주인공의 누나나 이모 역을 맡는 이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짧지 않은 시간을 주부로 지낸 뒤 원숙한 연기력을 뽐내며 돌아온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고 연기에만 매달리는 이들도 드물지 않다.

연륜의 힘 발하며 이제는 돌아와
카메라 앞에 선 누님같은 배우여

다양한 캐릭터로 주인공 꿰차니
시청자 팔할이 동년배 여성이라

30대 여배우들의 맹활약=오연수(34)·김희애(38)·신애라(36)·하희라(36)·채시라(37)가 가장 대표적이다. 오연수는 1년6개월여만인 지난해 한국방송 <두번째 프로포즈>에서 상한가를 친 뒤, 현재 주말드라마 <슬픔이여 안녕>에서도 독특한 캐릭터로 열연하고 있다. 김희애는 <부모님 전 상서>에서 주인공 역할을 충실히 해냈고, 신애라 또한 6년만에 출연한 <불량주부>로 새로운 가능성을 보였다. 하희라는 올초 에스비에스 특집극 <내 사랑 토람이>로 2년여만에 안방극장으로 돌아왔으며, 현재 <사랑한다 웬수야>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채시라(37)는 지난해 한국방송 <애정의 조건>에서 열연한 뒤, <해신>에 출연해 특유의 카리스마를 자랑했다. 올초 <봄날>로 10여년만에 연예계에 복귀한 고현정(34), 우여곡절을 겪으며 조만간 <장밋빛 인생>에 출연키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최진실(37)도 빼놓을 수 없다.

<한강수 타령>에 출연했던 김혜수(35), <변호사들>에 나오고 있는 정혜영(32), <올드 미스 다이어리>에 출연중인 예지원(30), <사랑찬가>의 장서희(33), <돌아온 싱글>의 김지호(31) 등도 티브이 드라마 주연급으로 활약중인 30대들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선아(31)와 <루루공주>의 김정은(30)은 가장 잘 나가는 30대다.

깊고 넓어진 캐릭터=짧게는 1년, 길게는 10여년만에 드라마에 복귀하는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떤 캐릭터로 돌아올 것이며 변신의 폭은 얼마나 줄 것이냐다. 결과는 30대 이혼녀부터 당찬 재벌2세 여성까지 다양하다. 예전에 견줘 캐릭터의 폭과 깊이가 확대됐다. 서른 즈음이면 누나와 이모를 거쳐 엄마를 맡으며 조역에 머물던 과거에 견줘, 의미있는 변화다.

1990년대 청순가련한 20대로 나오던 이들이, 솔직담백한 30대 여성으로 과감히 몸을 바꿨다. 사업가로 우뚝 서는 이혼녀(<두번째 프로포즈>의 오연수),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자폐아를 홀로 키우는 여성(<부모님 전 상서>의 김희애) 등 이혼녀에서부터 실직한 남편 대신 생활전선에 나서는 주부(<불량주부>의 신애라), 힘겹게 재활에 성공하는 시각장애인(<내 사랑 토람이>의 하희라), 미모와 지략을 겸비한 여걸(<해신>의 채시라) 등 이들의 배역은 다양하다. 재벌집 딸(<루루공주>의 김정은, <사랑한다 웬수야>의 하희라) 도 맡는다.

그러나 한계도 있다. 30대 배우가 20대 캐릭터를 연기하거나, 30대 캐릭터에 20대의 취향을 덮어씌운 경우가 적지 않다. 이혼녀나 평범한 주부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30대의 진솔한 고민은 아직도 부족하다. 들뜬 성공담이나 아줌마판 신데렐라 이야이가 많아, 인생 30년을 살아오며 몸소 겪은 배우의 희노애락이 드라마의 에너지로 온전히 쓰이지 못하기도 한다.

30~40대 여성 시청자들의 힘=30대 여성 연기자들이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티브이 드라마 전면에 등장한 것은 무엇보다 30~40대 여성들이 드라마의 주시청층으로 등장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최근 <내 이름은 김삼순>의 시청자 분석에서도 드러나듯, 30~40대 여성이 드라마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이들이 보면 뜬다’는 것이 불문율일진대, 이들이 가장 크게 공감할 수 있는 동년배 여성들의 자연스런 연기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 제작진의 입장이다.

이른바 ‘아줌마 드라마’가 부쩍 는 것도 그래서다. 30대 주부들의 결혼생활과 이혼, 재취업 등을 소재로 담아 ‘아줌마’들을 공략하는 것이 필요해진 것이다. 주시청자인 30~40대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늘어나고 사회적 지위가 예전에 견줘 급속도로 향상된 것이 드라마의 내용을 바꿨다. 조역에 머물던 드라마 속의 30~40대가 주인공으로 올라서면서 캐릭터가 다양해졌고, 이를 맡아줄 연기자의 수요도 늘어난 것이다.

스타시스템 공고화=이젠 잘 난 외모만으로 연기자가 되기 어렵다. 연기 수업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로 하룻밤 사이에 톱스타로 떠오르곤 하던 일은 옛일이 됐다. 그래서 30대 여성 연기자들은 20대 연기자들과 경쟁할 일이 적어졌다.

달리 보면 30대 여배우들의 활약은 스타 시스템, 즉 스타를 관리하는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공고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있다. 결혼 등으로 연기를 쉬더라도,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복귀할 준비를 한 이들은 성공했다. 외모 관리도 큰 몫을 한다. 소속사가 공식적으로 내놓는, 배우의 나이가 최대 4살까지 차이가 나는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겉모습은 거의 10살 이상 젊어보인다. 자기 관리 능력 덕분이지만, 우스개 소리로 ‘과학 기술’의 발달을 지적하기도 한다. 일상화된 성형수술 등을 꼬집는 말이지만, 다르게 보면 사회·경제적 역량이 높아진 여성들이 시간과 돈을 스스로에게 투자하는 일이 많아지고 자연스러워졌다는 뜻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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