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매혹적이고 순수한 안나 카리나
2005-08-11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춤추는 모습이 너무도 슬픈 여인이 있다. 나는 이 여인을 60년대 초반의 프랑스 영화에서 볼 수 있었다.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한 20대 초반 씨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에서는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곤 했다. 전설적인 감독들의 영화를 즐기기보다는 공부하면서 저 영화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감? 하는 심정으로 눈이 벌개서 화질도 좋지 않고 자막도 열악한 비디오를 보던 시절이었다. 나는 배우를 중심으로 영화를 보지 않았다. 아무리 이쁜 배우들도 기억하지 못하며 감독 이름 외우기에 바쁜 때였다.

그때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를 친구들과 함께 봤다. 그런데 그의 영화에는 항상 같은 여인이 등장했고,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매혹적이었다. 곧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안나 카리나! <비브르 사 비>에서 그녀는 창녀이다. 하지만 순박한 눈빛으로 할아버지와 세계에 대한 심오한 철학을 논하기도 하고, 슬픈 얼굴로 담배를 피워 물기도 한다. 그리고 주크박스를 틀어놓고 혼자 춤을 추기도 한다. 그녀의 그런 모습은 최근 장만위에게 많은 남성들이 느끼는 매혹과 열광을 넘어선다고 단언할 수 있다. 불운한 한 여자의 일생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발하는 그녀의 얼굴은 순수함 그 자체를 보여준다.

<국외자들>에서는 루브르 박물관을 단숨에 내달아 숨넘치는 자유의 열정을 보여준다. <알파빌>에서 그녀는 사랑이란 말을 알지 못하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어두운 도시의 창녀지만 결국 그녀는 사랑을 깨닫게 된다. <미치광이 삐에로>에서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도피행각을 펼친다. 그녀는 베트남 처녀가 되기도 하고, 미국인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영화들은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들이다. 그리고 장 뤽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는 사랑하는 사이였고, 부부였다. 훌륭한 영화감독에게는 훌륭한 여배우가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여배우가 존재한다.

나에게 이것은 콤플렉스와 함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난 감독이 될 수 없어, 어쩌면 아름다운 여인과도 함께 할 수 없어! 하지만 아무도 장 뤽 고다르처럼 안나 카리나를 아름답게 잡아내지 못했다. 안나 카리나 표정에서 묻어나는 본질적인 순수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슬픔을 동시에 잡아내진 못할 것이다. 너무 순수하고 아름답기에 역설적으로 퇴폐적이기까지 한 그녀의 눈빛과 표정은 고다르 영화의 심오한 주제를 반영하고, 영화의 주제는 그녀의 이미지를 통해 매혹적으로 스크린에 잔영을 남긴다. 그리고 그녀의 이미지는 영화와 함께 깊이 각인된다. 하지만 장 뤽 고다르도 안나 카리나와 평생을 함께하진 못했다.

조영각/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미치광이 삐에로>를 찍을 무렵 사랑하는 여인이자 영화적 동지였던 고다르와 카리나는 불화를 겪었고, 고다르는 카리나를 남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음모를 가진 팜므파탈로, 명품과 춤에 집착이 있는 여자로 그리기도 했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를 마지막으로 고다르와 카리나는 결별을 하는데, 이 영화에서 보여준 클로즈업 화면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느끼게 해준다. 이후 그녀는 감독이 되어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고다르와 함께 했을 때만큼 빛을 발하진 못했다.

예순 다섯이 넘은 그녀의 모습을 최근 박중훈이 출연한 <찰리의 진실>에서 잠깐 볼 수 있었다. 너무 짧아 아쉽기도 했지만, 시간이 아름다움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과 배우에게 어울리는 영화와 역할이 얼마큼 중요한지 새삼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게 인간의 표정이 얼마나 심오하고 아름다운지를 알게 해준 배우였고, 마음 속의 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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