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궁금한 거 있으세요? 저번에 여진이랑, 소리랑 같이 만나고, 또 이창동 감독님 때문에 통화하고 하면서 다 말한 것 같은데. 요즘 인터뷰 기사가 많이 나서 더 물어볼 것도 별로 없다구요? 하긴 오전에도 인터뷰 하고 왔어요. 일간지라 사진 많이 안 찍을 줄 알았는데, 10통 가까이 찍고는 마지막 컷 하나 건졌다고 하더라구요. 카메라에 많이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나봐요. 그래도 많이 발전했어요. 이제 카메라 앞에 서도 땀은 안 흘리거든요. 그러고 보니 저 1년 새 스타덤 코너 세 번째예요. 그런 배우 흔치 않죠? <박하사탕> 때문에 정말 컸나봐요. (웃음) 하긴, 전엔 시나리오 복사한 거 한 두장 받아서 오디션 하고 그랬는데, 이제 완전한 시나리오가 와요.
저번보다 많이 밝아진 것 같다구요? 그때가 부산영화제 직전이었죠, 아마. 그땐 저 스스로도 이상했어요. 질문 하나 잘못 하면 터져버릴 것 같았다구요? 왜 외국 배우들은 너무 역할에 몰입해서 끝나고 나면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잖아요. 후시녹음 끝나면서 감독님이 낼모레 보자 했을 때 안 볼래요, 한달 안에 다 빠져나와야겠다 했는데…. 기술시사에서 처음 영화를 봤을 때도, 영화제 때 시사회 보고도 계속 기분이 안 좋았어요. 척한 것 같아서. 부산에서 홍은철 아나운서가 하는 방송에 나갔는데, 자꾸 저보고 어둡다고 해요. 못 빠져나오나 했어요. 촬영 때 감독님이 연기하지 말라는 말 많이 했었죠. 난 연기잔데, 연기하지 말라니. 뭐 대학 때 연극하면서 많이 들은 말이라 그나마 무슨 뜻인진 알고 있었죠. 진짜 같아야 해요. ‘같아’라 결국 사기이긴 한데, 척은 하지 말자, 그랬어요. 구체적 근거 없이 이럴 것이다 하는 추측만으로 덤비지 말자, 그러면 보는 사람도 안다 하고. 하는 사람이 구체적이면 행동에 비하인드 스토리가 생겨나잖아요. 코비비는 버릇이 나한테 가장 익숙한 행동 중 하난데, 그럼 김영호한테서 보일 수도 있어야죠. 영화마다 그래선 안 되겠지만 내 일부가 역할에 당연히 녹아 들어야겠죠.
찍을 땐 거의 안 나오는 장면이 없어서 아주 고생했는데… 오죽하면 영호가 멀리서 아무 생각 없이 카메라 근처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는 장면 하나만 있었으면 했을까. 처음부터 자살하려니 이해도 안 되고 고생하다가 죽어가는 순임이 만나고, 바람피우는 아내를 잡는 두 번째 장 후반 세 번째 장 초부터 조금씩 빠져들었죠. 캐스팅 전에 영호의 이미지를 그려보곤 했던 미술팀 친구가 딱 저라고 그런 것도 힘이 됐어요. 감독님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면 재미없다. 참아야지. 관객이 울어야지” 하셨지만, 광주 장면 있죠, 실수로 쏴죽인 소녀를 안고 우는 장면. 그땐 너무 깊이 빠져서 그 배우를 거의 던질 뻔했어요. “신발에, 신발에 물이 있어요”하면서 우는 장면은 지금 봐도 제일 가슴에 남구요. 공사 때문에 수몰된 지역을 고생고생 다시 만들어서 찍은 마지막 스무살 장면은, 맨끝에 눈물이 난 걸 저도 감독님도 나중에 보면서야 알았어요.
엊그제 감독님 고향이라고 홍보차 대구 가서 술먹다가 감독님이 제 팔짱을 끼기에 째려 봤거든요? 와, 맘에 안 드나, 하기에 견딜 만은 한데요, 그러고 웃었어요. 아주 큰 분을 얻은 것 같아요. 밉다구 했던 거요? 징한 거죠. 처음에 인터뷰할 때, 저도 했으니까 10%쯤 몫이 있겠지만 90% 감독님이 한 거라고 했더니 그러면 안 된다면서, 차라리 욕을 하래요. (웃음) 근데 <박하사탕>에 대해선 다들 해도 너무 한 거 아닌가. 너무 좋게, 많이 쓰고. 저한텐 짐이 될 거라고 했더니 감독님이 걱정 말고 실패도 해 봐, 다 재산 될 거다 그러셨어요. 감독님 저 <박하사탕>, 그냥 영화 하나 한 거죠? 그랬더니 그럼, 그러시더라구요. 하는 동안에도 매순간순간 부담이 크고 힘들었지만 욕심은 없었어요. 대단한 표현이나 강한 의욕을 보인 적도 없고. 감독님한테도 감사하다, 열심히 하겠단 말 한 마디 안 했죠. 오히려 헬렐레 해 있으면 감독님이 왜 그러냐고 묻곤 했어요. 어려운 장면이다 싶어 절 보며 얘기하면 대답도 잘 안 하고. <박하사탕>은 누가 했어도 어느 선까지 끌어올려지고, 칭찬을 들었을 거예요. 난 복이 넘친 거지. 누가 <박하사탕>을 보고서야 설경구란 배우를 확실히 인식하게 됐다고 했는데, 거기까지였으면 해요. 너무 과한 찬사보다, 이창동이 설경구란 배우 하나를 갖게 됐다는 표현이 기억에 남았어요. 내가 속하고 싶기도 하고. 닮았다는 말도 많이 들어요. 정말 좋은 작품 하나 한 거고, 이제 다른 걸 해야죠. 실패한대도 가르쳐주는 게 있을 테니까. 얼마나 했다구요. 운이 좋았지…. 계속 배워야죠.
요즘은 보라매 공원에서 훈련받아요. <단적비연수> 때문에. 기초체력 쌓느라 뛰고, 계단 오르내리고, 난생 처음 말도 타고. 27일 크랭크인 예정인데, 나중에 현장에서 시간 낭비 안 하려고 목검으로 합도 맞추고 있어요. 출연진들 거의가 모여서 훈련하는데, 조연하는 친구들하고 마음이 잘 맞아 재미있어요. 저도 좀 알잖아요. 지금도 배우 같지 않은 배우고. <박하사탕> 0시 개봉한 새해 첫날, 관객 나올 때 박수치는데 누가 제 바로 옆 사람한테 묻더군요. 설경구가 누구냐고. (웃음) 제가 뭐 스타가 되겠어요. 스타 안 돼도 배우는 된다구요? 그럼 되죠. <단적비연수> 한다니까 반응이 두 가지더라구요. ‘잘했다’와 ‘왜 그 작품이냐’. 어떤 사람은 한 3년 숨어 지내라, <박하사탕>의 배우로 남으라고도 했어요. 부산영화제 갔다 와서 그 고민을 많이 했죠. 근데 그렇게 가면 못 돌아올 것 같더라구요. <박하사탕> 비디오 들고 다니면서 저 배우였어요,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고. 진중하고 사회적인 시나리오도 많았는데, 한쪽으로 몰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은행나무 침대>는 재미있게 봤어요. 그때만 해도 시대물에, 그런 소재 자체가 좀 특이했잖아요. 성공한 전편을 안고 가는 영화라 사실 부담도 되네요. 하지만 상업영화도 하고, 다음엔 멜로드라마도 해보고. 그냥 흘러가는 듯하면서, 이창동 감독님하고는 꼭 다시 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