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이 코너에서 나는 한 극장주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려 했었다. <박하사탕>을 1개관에서라도 장기상영할 수 있도록 그의 양식에 호소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관객이 늘면서 개봉관이 늘게 된 것이다. 시장이란 기본적으로 대자본가가 다루기 편하도록 설계된 제도이지만, 아주 가끔 그 힘관계를 교란하는 작은 반란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은 음흉한 만큼 건강하기도 한 것이다. <박하사탕>이 개봉관을 줄여가다가 설에 극장가에서 사라져주기로 돼 있었고, 그것은 소프트웨어 공급자와 배급사의 힘관계에 의해 예정된 코스였으나, 뜻밖에 관객의 힘이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실제로 배급업자와 극장주들이 반드시 좋은 영화 편은 아닌 다음에야, 시장 속에서 ‘좋은 영화 볼 권리’를 유린당하지 않으려면 대중도 스스로 저항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박하사탕>은 그 흥미진진한 사례다.
<박하사탕>이 전폭적인 호평에 휩싸이자 짐짓 비판적인 멘트들이 등장하는 요즘이다. 그 하나가 ‘과거에 관한 영화’라는 것이고, 이런 지적은 처음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나는 이런 비판에는 저항하고 싶다. 과거에 관한 영화는 나쁜가. 밀레니엄 전환기의 대중은 너나없이 미래만을 이야기하고 있고,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주력 관객층에 소구하려는 영화들은 오직 현재를 이야기하려 한다. 밀레니엄의 미래학과 영화가 다루는 현재의 공통점은 현실의 함량보다 판타지의 함량이 커 보인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논쟁 이후의 무료한 시대에 대중은 판타지에로 투항하고 싶어하는 걸까. 하지만 박노해가 테크노댄스를 배우고 싶다고 하고, 전두환이 DJ를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한다고 해서, 80, 90년대 역사의 의미와 무게를 부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두 잊고 화해하고 행복해진 척한다면 그건 집단적인 기억상실증에서 비롯된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서 <박하사탕>은 현재에 관한 영화다. 바로 지금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어떤 성분들, 다시 말해 우리 시대의 정체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이창동 감독이 이처럼 정치적인 주제에 도전하면서 그의 영화 선배인 박광수 감독을 결정적으로 추월하는 점은 바로 그 시대를 머리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생생한 표정을 살려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간단한 신파 장치로도 건드는 눈물샘이 아니라 마음 깊숙한 곳에서 슬픔의 현을 건들고, 메마른 각성이 아니라 축축한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바로 그런 감흥이 정통 드라마 형식이 아니라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내러티브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 기이하다. 이런 것들이, <박하사탕>에 대해 관객이 볼 권리를 주장해도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