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꼬마들을 위한 큰 영화제, 제1회 고양어린이국제영화제
2005-08-17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제1회 고양어린이국제영화제, 8월19일 개막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 공식 포스터

어린아이들은 무언가를 기억하기보다 각인한다. 흔적없이 잊은 듯하다가도 갑자기 치고 올라오는 오래전 영상이나 느낌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라고 다를 리가 없다. <똘이장군>을 보고 김일성이 늑대인 줄 알았다는 조부모 세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릴 적에 보았던 영화들은 두고두고 미지의 세계를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그런 점에서 제1회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는 반가운 행사다. 어린이를 위한 영화가 많지 않은 요즈음, 대상연령 3∼6살이라고 적힌 영화들을 만나고, 어린이가 직접 만든 영화까지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도움이 되는 기회일 것이다.

어린이와 그들을 데리고 영화를 보러가야 하는 어른들이 가장 반색할 만한 프로그램은 장편영화를 상영하는 ‘월드 프리즘’이다. 아동문학에서 유독 굳건한 전통을 다져온 북유럽, 그중에서도 노르웨이에서 온 영화 <우유의 빛깔>이 개막작이고, 어른과 아이가 두루 빠져 있는 애니메이션 시리즈 <이누야샤>가 네 번째 극장판 <이누야샤 극장판-수수께끼의 붉은섬>으로 중량을 키워 찾아온다. 검은 머리의 소녀 전사 티아나가 동물 친구들과 함께 아마존강 유역 열대우림을 지키고자 활을 드는 <소녀전사 티아나> 1편과 2편도 강대국 중심으로 맞춰진 어린이의 시각을 넓히기에 알맞은 귀여운 시리즈다. 이 밖에 전주영화제 등에서 상영된 애니메이션 <부와 지노의 대모험>, 정형외과 병동에서 장기치료를 받고 있는 소년들이 사춘기를 맞이하는 <4층의 소년들>, 전세계를 뒤흔든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파도를 맞아 혼란을 겪는 시골 소녀의 이야기 <고요의 바다> 등이 무지개 같은 색채와 감정으로 어린이들을 만나게 된다.

단편영화는 집중력이 짧은 어린이에게 걸맞은 양식. ‘꼬마 영화들’은 곧이곧대로인 제목대로 미취학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두산>으로 유명한 야마무라 고지의 <꼬마 키플링>과 캐나다의 명장 코 회드만의 ‘루도빅 시리즈’ 중 한편인 <테디베어 루도빅-바람은 요술쟁이>를 보면 알 수 있듯, 영화의 질마저 꼬마라는 의미는 아니다. ‘짧고 재미난 이야기들’은 드라마틱한 재미를 추구하는 프로그램. <마리 이야기>의 이성강 감독이 한국 설화를 각색해 만든 <오늘이>를 비롯해서 정말 재미가 있는 단편을 모았다. 또래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성장영화’와 가보기 힘든 나라의 문화를 간접체험하는 ‘세계문화여행’도 고지식한 제목보다는 훨씬 생기있는 영화들을 모아놓은 프로그램들이다.

개막작 <우유의 빛깔>

‘키드스코프_영화의 어린 시절’은 움직이는 그림이라는 영화의 의미에 충실한 프로그램이다. 올해 키드스코프가 들여다보는 영역은 걸작 그림책들. 웨스턴우즈 스튜디오가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 <깊은 밤 부엌에서>, 에즈라 잭 키츠의 <눈오는 날> <피터의 의자>, 토미 드 파올로의 <마법사 노나 할머니> 등을 원작의 색깔에 맞추어 제각기 다른 기법으로 재현한다. 또 하나의 특별전은 과거 어린이 관객을 위해 만들어졌던 영화를 추억하는 ‘키드매니아_아시아 꼬마 영화광’이다. 한때 <괴수대백과> 등의 시리즈 문고본을 낼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괴수영화들이 올해의 추억어린 영화들. <고지라>의 뒤를 이어 ‘어린이의 친구’라는 모토 아래 제작된 <가메라>가 3편까지 상영되고, 한국영화인 <우주괴인 왕마귀> <귀수대전쟁>도 함께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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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소개

고사리의 비밀

사람들이 사라지면 장난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고사리의 비밀>은 아이 적에 한번쯤은 해보았을 법한 상상에 기대는 영화다. 인형이 움직이는 속도는 느리지만 정성이 묻어나는 작품. 아이들이 빠져나간 텅 빈 유치원에 TV와 비디오를 훔치려는 십대 소년 두명이 들어온다. 귀중한 물건인 줄 알고 쓰레기봉투까지 집어간 그들은 짐에 묻어간 인형들의 신고로 붙잡히지만, 그 와중에 숲에 떨어진 인형들은 유치원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 허둥댄다. 때마침 그날 밤은 해가 가장 긴 하지. 인형들은 하짓날 밤 고사리꽃에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을 알고 있다. 감독 타두츠 윌코츠는 체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거치면서 30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어온 인물. 어두운 숲속에서 꽃잎이 빛을 떨구고 인형들이 그 빛을 받으며 노래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단편영화 ‘짧고 재미난 이야기들’

<나이파의 요술호박>

민담과 우화 등에서 모티브를 얻은 재미난 단편영화들을 모았다. 애니메이션 <나이파의 요술호박>은 <아라비안나이트>풍의 러브스토리. 오랫동안 아기를 원했던 왕과 왕비는 잘생기고 총명한 왕자를 얻어 기뻐한다. 그 무렵 오랫동안 아기를 원했던 농부 부부는 예쁜 호박을 얻어 기뻐하며 애지중지 키운다. 보름달이 뜰 때면 호박을 깨고 튀어나오는 아름다운 여인. 왕자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언제까지나 호박과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책을 강구한다. <개미귀신>은 공포영화스러운 제목과는 달리 깜찍한 곤충 어린이들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이다. 학교를 땡땡이치고 놀러 나온 곤충들은 온갖 위험과 마주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상대는 땅속에 사는 개미귀신. <그린치>와 비슷한, 괴물과 주민들의 화해담이다. 한국에도 비슷한 민담이 존재하는 <열 두 달>, 영국의 유명한 TV애니메이션 시리즈인 <난쟁이 정원사 고든-예쁜 정원 경연대회> 등이 이 프로그램에 포함돼 있다.

미사 미

열살 먹은 소녀 미사는 어머니가 죽고나서 외롭게 살고 있다. 아버지가 여자친구와 함께 휴가를 보내는 동안 할머니 집에 머물게 된 미사는 스웨덴 북부 깊은 숲속에서 수컷을 잃고 홀로 된 어미 늑대와 친구가 된다. 소녀와 어미 늑대와 아기 늑대 두 마리. 이 아늑한 모임은 마을에 고용된 사냥꾼이 어미 늑대를 총으로 쏴죽이면서 산산조각이 난다. 미사는 아직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아기 늑대들에게 새로운 엄마를 찾아주어야만 한다. 동물과 인간의 우정은 자주 동화나 영화의 소재가 되어왔다. <미사 미>는 그 동물을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밖에 없는 맹수로 설정해서 아이러니를 더했다. 비현실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애틋하기도 한 우정. 맑은 눈동자로 외톨이가 된 소녀의 마음과 필사적으로 늑대를 구하려는 안간힘을 표현한 킴 얀손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소녀전사 타이나1, 2

검은 머리의 원주민 소녀 타이나는 할머니와 함께 아마존강 유역 정글에서 살고 있다. 그녀의 친구는 동물이고, 그녀의 스승은 숲이다. 그러나 아마존은 위협받고 있다. 어느 날 타이나는 야생원숭이를 잡아가려는 악당들에 맞서 원숭이를 구해주고, 스스로를 그리고 숲과 동물들을 지키는 법을 익혀간다. 같은 해에 제작된 2편. 타이나는 희귀한 조류를 포획하려는 과학자 일당과 다시 한번 대결을 벌인다. 타이나는 어찌보면 타잔과 비슷하게도 보일 수 있다. 분명하게 다른 점은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어린 소녀이고, 외부에서 떨어졌기에 언젠가는 떠나야만 하는 타잔과 달리 아마존에 뿌리내린 원주민이라는 사실이다. 화살을 쏘는 모습이 약간 어설프기는 해도 그 때문에 이 과묵한 소녀는 정이 가는 타입. 어린이들에게 인기를 얻어 1편과 같은 해에 2편까지 제작됐다.

이누야샤 극장판-수수께끼의 붉은 섬

TV애니메이션 시리즈 <이누야샤>의 네 번째 극장판. 다카하시 루미코의 만화가 원작인 <이누야샤>는 인간과 요괴의 피가 섞인 이누야샤와 현대에서 전국시대로 불려온 소녀 가영이 사혼의 구슬을 찾아다니는 모험담이다. 중심인물은 두명이지만 꼬마여우요괴 싯포와 법사 미륵, 요괴퇴치사 집안에서 태어난 산고, 반요인 이누야샤를 경멸하는 그의 형 셋쇼마루처럼 수많은 캐릭터를 쏟아내왔다. 해마다 제작되는 극장판 중에서도 <수수께끼의 붉은 섬>은 다카하시 루미코가 극본작업에 참여해 TV시리즈와는 상관없는 오리지널 스토리를 부여한 작품이다. 50년에 한번 나타나는 전설의 섬 봉래도는 인간과 요괴가 어울려사는 낙원이었다. 그러나 낙원은 파괴되었고, 반요 아이들은 이 섬에 갇혀 살고 있다. 50년 전 금강과 함께 아이들을 구하려 했지만 실패했던 이누야샤는 다시 나타난 봉래도에 가영과 싯포와 미륵 등과 함께 도착한다. 그곳엔 이누야샤 일행의 미래를 알고 있는 존재도 있다.

줄라이카

카리브해 연안 네덜란드령 큐라소에 사는 소녀 줄라이카는 네덜란드에 돈벌러 간 어머니와 떨어져 할머니 집에서 지내고 있다. 식품점을 하는 할머니는 마음이 좋아서 돈없는 이웃들에게 외상으로 물건을 내주곤 한다. 하지만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달라지는 게 사람 마음. 아무도 돈을 갚지 않아 가게는 문닫을 위기에 처하고, 줄라이카는 치즈가게 아저씨로부터 외상주지 않는 비법을 전수받지만, 여전히 마음 좋은 할머니가 장애물이 된다. 가난한 나라의 풍경은 어디나 비슷한가보다. 학비를 내지 못해 그럴 거면 집에 돌아가라고 구박받는 줄라이카는 30, 40년 전쯤 한국에서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씩씩하게 가게를 구할 방법을 생각해내는 줄라이카가 기특한 영화.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시작, 종종 끼어드는 아득한 환상 등의 구성이 특이하다.

키드스코프_영화의 어린 시절

<괴물들이 사는 나라>

아이들은 책 읽어주는 엄마를 좋아하겠지만, 성우처럼 감정 넣어 읽어주는 건 조금은 부끄럽기도 할 것이다. ‘키드스코프_영화의 어린 시절’은 그런 어머니를 대신하는 책 읽어주는 영화들이다. 천재라고 칭해도 손색없는 모리스 샌닥은 대표작인 <괴물들이 사는 나라> <깊은밤 부엌에서>를 선물한다. 엄마한테 혼나고 방에 갇힌 맥스는 갑자기 정글이 되어버린 방에서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한다. 책장 밖으로 뻗어나올 듯한 자유로웠던 그림이 스크린 위에서 홀로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다. <깊은밤 부엌에서>는 한밤중 부엌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깬 아이가 뚱보 요리사들과 노래하며 빵만드는 이야기. 칼데콧상 수상작인 에즈라 잭 키츠의 <눈오는 날>은 흰눈이 쌓인 날의 서정을 살렸고, <모기는 왜 귓가에서 앵앵거릴까?>는 제목이 묻는 질문을 탐구하며 아프리카에서 방금 데려온 듯한 선명한 그림을 선보인다. 자막을 읽지 못하는 어린이를 위해 ‘영화 읽어주는 이’가 동반할 예정.

해체된 가족, 그리고 어린이

<즐거운 우리 집>

IMF 사태가 휩쓸고 간 90년대 후반, 빈곤과 소외 속에 방치된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단편영화 네편을 모았다. 명계남이 아버지로 출연한 <즐거운 우리집>은 역설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파산한 다음 초라한 집으로 옮겨간 가족들은 유치원에서 불이 나 아이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기 시작한다. “차라리 잘됐어”라는 아버지의 묘한 말. 그러나 초인종이 울리고 죽은 줄 알았던 막내 지혜가 돌아온다. 어머니와 언니는 무언가를 계획하는 아버지에게 우리가 지혜를 돌볼 수 있다며 항의한다. 송일곤 감독의 <소풍>도 <즐거운 우리집>과 비슷한 상황을 다루고 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소풍을 나선 부모. 그러나 그 소풍엔 어딘지 그늘이 깔려 있다. <비둘기>는 좀더 처참한 현실에 주목한다. 소녀는 마약중독자 아버지의 강요로 다리를 저는 척하면서 앵벌이를 해왔다. 그 아버지가 죽지만, 소녀는 죽은 할머니가 한달 넘게 방치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이 연출한 <도형일기>는 죽은 아버지의 시체와 더불어 며칠을 보낸 소녀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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