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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회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아일랜드> <로봇>
2005-08-17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일러스트레이션 : 김연희
<아일랜드>와 <로봇>이 제기하는 계급론과 존재론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런 막연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를 찾아 대비시키는 것이 상책이다.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것이 바로 ‘분별지’ 아니던가?) 외계인/사이보그/복제인간/괴물/귀신 같은 ‘사이비 인간’을 등장시켜,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과 ‘아닌 것’을 구분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SF나 호러는 본래 ‘인간존재론의 열린마당’이다. 때문에 <공각기동대>나 <블레이드 러너>가 기억과 감정에 대해 발언하거나, <프랑켄슈타인>이나 <디 아더스>가 타자성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한편 상상력이 발휘된 텍스트 안에 인간사회의 질서가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경우도 있다. 판타지적 존재를 인간사회의 유비로 차용한 것이다. TV시리즈 <혹성탈출> 속 저급노동을 하던 유인원들은 인종문제를 발언하는 장치였고, <바이센테니얼 맨>은 ‘백인남성의 시민-되기 과정’을 담고 있으며, <마다가스카>의 동물은 완벽한 ‘여피’의 의식과 생활을 체현한다. 즉 이들 영화는 인간의 ‘존재론’보다 ‘계급성’에 초점을 맞춰 읽어야 한다.

최근작 <아일랜드>와 <로봇>은 어떨까? 흔히 복제인간의 문제를 그린 <아일랜드>에서 존재론을, 인간사회의 계급문제를 의인화한 <로봇>에서 계급론을 보고자 하겠지만, 여기선 반대로 <아일랜드>가 제기하는 계급론과 <로봇>이 재현하는 인간존재론을 기술해보겠다.

<아일랜드>가 제기하는 계급론

클론은 사람과 똑같은 재질과 유전자를 지닌다. 신체적 속성이 완전히 같기 때문에 몸이 다름으로써 발생하는 사이보그의 결여(<블레이드 러너>의 짧은 수명)나, (<프랑켄슈타인>의) 인종적 혐오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인간과 다른 점은 원본으로부터 파생된 복제인간이라는 ‘출신성분’과, ‘정신의 발달 정도’와, ‘상품’으로 존재한다는 ‘사회적 위상’이다. 그런데 제한된 교육으로 유지시킨 ‘정신의 미발달’은 인간과 똑같은 두뇌를 이용한 자가발전으로 격차가 줄고, 이제 다른 것은 사회적 측면뿐이다. 이들은 온전한 몸과 정신을 지니지만, 출신성분의 차이에 의해 ‘목적’이 되지 못하고 ‘수단’이 되어, 착취당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인권은 어찌 되는가?

그런데 ‘복제인간의 인권론’은 자칫 함정을 지닌다. 클론과 인간의 차별을 논하면서 인간사회 내부의 모순을 무마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언제나 ‘목적’으로 대우받는 듯, 인간끼리는 마치 평등한 듯 문제를 은폐한다. <아일랜드>가 보여주는, 출신성분에 따라 제한된 교육과 가공된 복지로 정신세계를 통제하고, 결국 그들 몸을 처참하게 착취하는 것이 오직 ‘미래’에,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에서만’ 일어날 일인가?

계급사회에서 노동력을 빼앗는 것은 결국 그의 ‘시간’(인생의 물리적 속성)을 빼앗는 것이요, 생명을 야금야금 빼앗는 것이다. 인종과 성차에 따른 착취는 더 직접적으로 ‘몸’과 결부되어 일어난다. (국경을 넘는) 성매매, 장기(난자)매매, 대리모 문제는 ‘현재’에도 서로 다른 사회적 조건에 놓인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씨받이>의 대사 “우리가 사람인 줄 알어? 껍데기만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여”라는 신분사회의 차별은 계급사회에서도 모양을 달리할 뿐 존재하지 않는가?

<로봇>이 제기하는 인간존재론

로봇의 ‘기계 몸’은 ‘인간 몸’에 대한 확장된 사고를 제안한다. 대저 몸이란 무엇인가? 우문현답은 “몸만 몸이 아니라, 기룬 것이 다 몸이다”. 부품을 끼우며 성장하고, 직능이 나뉘며, 몸을 업그레이드 못 시키면 폐기되는 건 현재 ‘인간 몸’에서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안경/의족 같은 단순한 보철이 아니라, 밖으로 노트북/휴대폰/자동차 등 기계와 접속하고, 안으로 외국어/전문지식/정보처리기술 등을 내장하며, 몸 가까이 국제적 매너와 상류사회의 습성이 ‘배게’ 하고, 아예 성형/다이어트/운동 등 ‘몸-만들기’를 통해, 우리 몸은 성장하고, 직능이 나뉘며, 업그레이드된다. ‘우리 몸’이 피부로 한정된 생래적 물질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구성물이며, 심지어 이미 기계와 접속하며 기능하는 ‘사이보그’임을 어찌 부인하겠는가? 이 몸을 만드는 전 과정에 계급적/인종적/성차적 차별이 가해지며, 권력은 바로 ‘우리 몸’을 통해 작동한다. 따라서 ‘몸의 업그레이드’를 강요하는 영화 속 폭력은 로봇에 인간을 투사하다 빚어진 은유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문자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육체를 착취하는 계급론’과 <로봇>의 ‘사이보그-존재론’은 ‘육체-자본’의 개념 속에서 서로 만난다.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기 전에, 인간사회의 존재방식을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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