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만원 줘요.” 당신과 자줄 테니 돈을 달라고 스물일곱의 여교사 최홍이 손을 내민다. 그녀의 얼굴 위론 기억하기 싫은 사랑의 상처가 그늘처럼 드리워져 있다. “내가 팔을 이렇게 움직여, 그럼 내가 저기 가 있어, 나 참 빨라”하고 ‘미친년’ 여일이 괴상한 목소리로 실없는 얘기를 한다. 열여섯, 열일곱쯤 돼 보이는 소녀의 얼굴 위론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깨끗하고 바보 같은 표정이 어려 있다. 둘 다 강혜정이다. 최홍과 여일의 나이차는 어림짐작으로도 10살이고,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타 섹스할 줄 아는 여자의 세상과 남한군-북한군도 구분 못하는 소녀의 세상은 서로에게 별천지다. 그러나 그 둘은 모두 진짜 같다. 최홍과 여일을 연기한 올해 만 스물셋의 여배우 강혜정은, 작은 체구와 정반대로, 묵직하다.
이국적이고 선이 굵은 마스크만 들여다봐도 강혜정은 평범한 사랑, 무난한 성격과 거리가 있다. 강혜정의 얼굴은 서구인의 그것처럼 굴곡이 심해서 각도와 조명에 따라 나오는 느낌들이 큰 폭으로 다르다. 잘 찍어놓으면 예쁜 소녀가 되지만, 여차하면 오기와 혈기로 똘똘 뭉친 불량소녀가 된다. 짧은 머리는 그를 남자처럼 보이게 할 때도 있다. 임수정, 이나영, 배두나, 손예진 등 다른 20대 여배우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말갛고 부드러운, 섬세하고 실크 같은 여성의 느낌을 강혜정의 얼굴에선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감정의 군살이 없는 강혜정은 작고 마른 몸을 비틀어 물가에 애를 낳고(<나비>), 생전 처음 만난 아저씨 뒤를 씩씩하게 쫓아다니며 전심으로 그의 복수를 돕고(<올드보이>), 끈질기게 꽁무니를 쫓아다니던 직장 동료와 드디어 섹스를 나누며 “너도 맛있다”는 대사를 숨처럼 내뱉고(<연애의 목적>), 머리에 꽃 하나 꽂고 팔랑팔랑 뛰어다니다가 소낙비를 받아먹는다(<웰컴 투 동막골>). 여인인지 소녀인지 혹은 소년인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정체를 모르겠다. 그저 괴물 같다. 이국땅의 여배우 줄리엣 루이스가 겹쳐 온다. 세상의 이면을 난폭하게 파고드는 영화 안에서 팔딱이던 에너지. 강간범에게 풋사랑을 느끼는 사춘기 소녀, 뒷골목 살인에 연루되는 록카페 보컬, 연쇄살인범의 순진무구한 애인 등 순진한 백치소녀와 관능적인 불량소녀의 경계를 거침없이 오가던 여자. 예쁘고 깜찍한 청춘물 세트 안에 놓인 마론인형이 되기를 절대적으로 거부해온 여배우말이다.
강혜정은 좀처럼 CF를 찍지 않는다. 찍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올드보이> <연애의 목적> 등에서 보여준 캐릭터가 이미 제품을 압도해버릴 만큼 강렬하기 때문이다. <올드보이>의 유명세를 타고 모 의류브랜드와 1년 전속 계약을 맺고 모 제과 TV광고도 찍기는 했다. 모 제과의 TV광고는 그즈음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로 주가가 높아진 임수정과 함께 찍었다. 싱그러운 녹음을 배경으로 뽀얗게 촬영된 이 TV광고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두 여배우에게 부여된 캐릭터의 대조다. "그 사람 잘 지내니?"라고 부드럽게 묻는 임수정에게 강혜정이 "나 차였어"라고 짤막히 대답한다. 빙긋 웃는 임수정, "고소하니?"라고 되묻는 강혜정. 사랑의 가능성을 본 사람은 임수정이고 사랑의 좌절을 안은 사람이 강혜정이다. 이 광고는 <웰컴 투 동막골>의 박광현 감독이 아직 CF감독으로 있을 때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다른 감독이 찍었다. "컨셉 회의를 다같이 했다. 쉽게 말해서 유약해보이는 임수정에게 좋은 역할을 주고 강해보이는 강혜정에게 당하는 역을 주자고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진 표면적인 이미지로 두 사람을 그렇게 구분한 거다." CF감독 경력이 8년인 박광현 감독은 “여자 광고모델은 둘 중 하나다. 예쁘거나, 귀엽거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쁘지도, 귀엽지도 않은 강혜정은 작은 TV화면 속에서 또래 소녀의 청초한 얼굴을 하고 편안한 척할 때보다 커다란 스크린 안에 어딘가 상처입은 몸으로 범상치 않은 몸부림을 칠 때 생명력을 얻는다(이 말이 ‘CF모델로 부적격’이라는 식으로 읽히지 않기를. 주류 CF가 선호하는 이미지가 아니란 뜻일 뿐 강혜정의 도발적 이미지를 살린다면 특별한 CF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해도 쉽게 하면 안 되고, 화사해도 도식적으로 화사하면 재미없다. 어렵게 생명을 얻고 싶은 것이 강혜정의 욕망이다.
알려진 일화 중에 “민망하면 당신들이 덮어”라는 게 있다. <올드보이>의 정사신을 촬영할 때 ‘컷’사인이 나고 ‘슛’사인이 나기 직전까지의 시간을 여배우가 어떻게 대처했는가에 대해 정정훈 촬영감독이 털어놓은 얘기다. 말 그대로 강혜정은 스탭들을 향해 “민망하면 당신들이 덮어”라고 했다(이번 인터뷰 자리에서 그 얘기에 대해 다시 묻자 강혜정은 “그게 그러니까…”라며 난처해했다. 불편하면 설명 안 해도 좋다, 라고 괜히 불편해진 기자가 불편하게 도움말을 꺼냈다. 강혜정은 “아니, 그게 아니고, 자세에 관련된 거라…”며 양손으로 체위를 묘사했다! 그리고 “물론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나도 덮긴 덮었다”고 덧붙였다). 박광현 감독은 <웰컴 투 동막골>을 촬영하면서 강혜정으로부터 “그러니까 여일이가 미친 거예요, 안 미친 거예요?”에 관한 질문을 다양하게 받았다. “미친 건 아니라고 했다. ‘순수하다’는 쪽으로 정리했지만 내가 의도한 건 아주 도식적인 순수함은 아니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이 보였으면 좋겠고, 엉뚱한 모습이 부각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생각을 비우고, 설레는 감정을 표출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어려운 주문이었다. 처음엔 굉장히 힘들어했다. 아무 생각없이 마냥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현장 모니터로) 자기 표정을 보면 여전히 생각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을 비워내기가 힘들다고 괴로워하더라.” 순수한 ‘척’에 지나지 않는 자기 연기에 자학을 거듭하던 스물세살짜리 여배우의 머릿속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텅 비어갔다. 나중에는 감독도, 저 사람이 지금 제정신인가 싶었더랬다.
‘재미’ 하나 만으로 덤비는 배우
어떤 면에서 강혜정은 전도연을 연상시킨다. 평범한 외모에 순박한 동네처녀마냥 착한 여자의 인상을 가진 TV탤런트 전도연이 <접속>으로 배우 데뷔를 할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가 (30대가 되어서도 주류 상업영화의 영역 안에서 주연의 자리를 지키는) 현재 위치에 오를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는 이목구비 또렷하고 팔다리 늘씬한 고소영이 도발적인 매력을 뽐내고, 맨 얼굴의 아름다움을 지닌 심은하가 새벽 이슬 같은 청순함을 어필하고 있을 때였다. 전도연은 그 틈에서 섬세하면서도 일상적인 여성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약속>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등에서 보여진 그의 맨 얼굴은 청초해지기를 바라는 여배우의 맨 얼굴이 아니라 보통 여자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는 <해피엔드> <내 마음의 풍금> 등 모험이 딸린 선택으로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전도연은 고정된 이미지를 변주하는 배우가 아니라 원형없이 변화해 온 캐릭터다. 이 점에서 강혜정이 전도연과 닮았다. 외모에 대한 집착은 버린 채 (그냥 순수한 게 아니라) 정신연령이 낮아 바보로 보일 만큼 순진무구한 캐릭터에 덤비는 여배우들은 많지 않고, 노출도 감당하겠다는 소신을 보여주는 여배우들 또한 많지 않다. 기질까지 닮았다. 전도연은 “연기만큼 좋은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했고, 강혜정은 “재미없으면 연기 안 한다”고 했다.
강혜정은 한계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단지 재미있단 이유로 오지에 뛰어드는 대담한 탐험가다. 예쁘게 보일 수 있는 욕망도, 돈을 편하게 벌 수 있는 계획도, 대중의 우상이 되고 싶다는 바람도 아직까지는 생각하려 들지 않는 투박한 연기자다. 강혜정은 주연치고는 보편적이지 않고, 조연치고는 너무 도드라졌고 입체적이다. 어느 한곳에 묶어둘 수가 없다. 박성혜 싸이더스HQ 이사는 “과거에 이런 배우가 나왔다면 너무 시대를 앞서가서 오히려 묻혔을 수도 있다. 여배우는 남자배우와 달라서 스타성 없이 연기력만으로 롱런하기는 어려운데, 우리나라 여배우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강혜정은 지난 4월 <보이지 않는 물결>(Invisible Waves)의 촬영을 마쳤다. 타이, 일본, 한국 등 3개국 합작으로 이뤄진 이 영화는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으로 유럽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은 타이 감독 펜엑 라타나루앙의 신작이다. 타이 땅에 놓인 일본인 남자의 이야기이며, 한국인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혼혈아도 낳는다는 영화다. 강혜정이 또 다른 오지를 만난 셈이다. 우리에게는 강혜정이 오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