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농담으로 내 영화감상 연대기에 1기와 2기가 있다고 말하곤 한다. 1기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20대 초반의 2년 동안이다. 몸 하나 편해보겠다고 시험까지 봐가며 선택한 군대 안에서 영어실력은 모자라지만 영화보기를 즐기는 동료들과 비공식으로 결성한 ‘자막없는 외국영화를 본 뒤 각자 알아들은 내용을 설명하고 전체 스토리를 끼워 맞춰가는 모임(자각스끼모)’은 내가 영화산업계의 변방에서나마 말석을 차지하고 이럭저럭 버틸 수 있게 해준 최고의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그 때 본 최신영화만 해도 200편이 넘으니 말이다. 뭐 ‘자각스끼모’가 항상 정확한 영화 스토리를 완성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게 자막있는 비디오로 자주 확인이 되고 있어 쓴 웃음이 나긴 하지만….
2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1998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8년째 하고 있는 ‘업무상 영화보기’는 1기에서의 ‘놀자고 영화보기’와 두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 하나는 보고 싶은 영화를 내가 고를 수 없다는 것이고 두번 째는 열심히 영화를 보면 월급을 준다는 것이다. 열심히 본다는 의미를 설명드리자면 소비자들에게 선보일 신작 영화들을, 그 영화의 장르와 배우와 스토리의 짜임새가 비슷한 지나간 영화의 수익자료와 비교 분석해서 최적 비용으로 최대의 수익을 내는 계획을 만들기 위해 볼 뿐 더 이상 즐겁기 위해 영화를 보지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슬프게도 업무상 보게된 1998년 이후의 모든 영화는 내게 더이상 영화가 아니었다. 10년 내의 영화속 여배우들도 배우가 아니었고. 그리하여 첫사랑의 여배우가 영원한 연인이 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영화와 관련된 직업 때문임을 고백한다.
1981년 제작된 <보디 히트>라는 영화와 그 해 제작된 <프리지가의 명예>라는 영화로 1985년 늦은 여름에 잇달아 혈기 방장한 20대 초반의 군인을 찾아온 캐서린 터너는 얼굴형과 체형, 그리고 목소리까지 이상형의 대척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까지 본 여배우들 중 가장 매력적이고 자극적인 캐릭터로 기억되고 있다. 더구나 남자 배우보다 여배우의 캐릭터가 한 영화의 전부를 지배한다는 것이 얼마나 흔하지 않은 일인지 최근의 <친절한 금자씨>가 친절히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현상을 신기한 관점으로 분석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1980년대 초반은 에이즈 공포가 할리우드를 위협하기 전이기 때문에 알(R)등급 영화들이 지금보다 훨씬 적나라하게 배우의 나신을 보여 줬고 그래서 <보디 히트>에서도 완벽한 허벅지로 대표되는 캐서린의 나신을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쨌든 허벅지, 흰 원피스와 빨간 스커트가 내게 준 성적인 충격은 대단했다. 하지만 단순히 유명 외국 여배우의 누드가 내게 끼친 순간적인 성적 충격만을 따질 경우 피비 케이츠의 <파라다이스>나 브룩 쉴즈의 <푸른 산호초>를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영화들보다 <보디 히트>의 성적 코드들은 그녀만의 독특한 목소리와 관음증을 최대한 자극하는, 마치 도청된 듯한 사실적인 대사들이 어우러져 더욱 강력하게 다가왔었다. 비교하자는 뜻은 아니고, 금자씨의 대사에 버금가는 <보디 히트>의 멋진 대화 한토막. “종이 타월이나 비슷한 것 없나요? 얼음 물에 적셔서.”(캐서린) “바로 대령하리다. 내가 직접 닦아드릴 수도 있는데.”(윌리엄 하트) “핥다 줄 생각은 없나요?”(캐서린) 이 대사만 읽어봐도 이 영화의 남녀간의 희롱은 선남선녀의 것이 아니라 잡배들의 그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와 나눠보고 싶은, 너무 매력적이라 거절할 수 없는 독과 같은.
<프렌즈>에서 챈들러 빙의 트랜스젠더 아버지로 등장해 날 경악시켰지만 <장미의 전쟁> 이후 배우로서 저지른 모든 과오를 못 본 척 할 만큼 난 캐서린 터너가 내 머리속에 심어준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사랑한다. 기껏 <엘에이 컨피덴셜>의 킴 베이싱어를 최근에 본 최고의 팜므 파탈이라고 하던데 웃기는 소리…. 내 관점에서 아직도 <보디 히트>를 넘어선 누아르 영화가 나오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더욱 그녀가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