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벤처 감독’ 장선우의 성행위예술이 스크린 위에 펼쳐지기 시작하자, 아줌마는 공연히 지 꼬라지가 돌아봐진다.
축 늘어진 어깨 밑에, 난데없이 펑 솟아올랐다간 또 하염없이 늘어지는 남산 밑에, 좆도 가진 거 없으면서 무모하기 짝이 없는 비옥한 남쪽나라가 반도처럼 펼쳐지는 아줌마의 대동여지도는, 그로테스크할지언정, 결코 ‘거짓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은막 위에 어른거리는 저 그로테스크한 그림자들도 거짓말이 아닐 수 있겠네.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거시기에 “숟가락으로 퍼낼 만큼 물이 고였다”는 Y의 독백 앞에서, 결코 젖지 않는 방수형 거시기의 소유자인 아줌마의 열등감이 고개를 들고야 만다. 날 때부터 방수형은 아니었다. 내 죄 아닌 니 죄에 얽매여…. 어쨌든 아줌마라면, 거시기에 “물이 고인 것으로 착각할 만큼 바세린을 발랐다”라는 대사가 더 실감났을 거다. 도대체 거시기가 무슨 그릇인 양 물구나무 서지 않는 다음에야, 아무리 한참 물오르는 이팔청춘이라도 퍼낼 만큼 물이 고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스테인리스 숟가락으로 푼다고? 이건 질의 구조와 강도를 아는 사람이라면 쓸 수 없는 가학적 대사잖아.
세기말 한국을 뒤흔든 영화를 보면서 느낀다는 게 고작 그거다. 세상이란 그런 거다. 다 지들 입장에서만 떠드는 거. 그런데 문제는 어떤 ‘지들’은 지 입장에서 떠들지 못하게 입막음 당한다는 거다. 그래서 장선우 같은 이벤트칩 내장형 엘리트 감독이 나서서 대신 떠들고 대신 싸워야 하는 걸 거다. 근데 <거짓말>은 누구를 대신해서, 누구와 싸우는 거지?
모르겠지만, 영화로만 따지면 이건 원래 싸울 문제도 아니었다. 세상 따라가려면 가랑이님 찢어져도 모자라지 싶다. J와 Y의 관계가 변태라고 말하는 도덕군자들은, 구름 위에 둥둥 떠서 살고 있는 모양이다. 너, 평생 현모양처나 하고 살아!라는 집단적 호통이 여관에서의 매질보다 덜한 가학일 것이며, 옛 써!라는 집단적 굴종이 자발적으로 똥먹는 일보다 덜한 피학일 것이냐 말이다. 관계란, 가학과 피학의 그물코가 사방연속무늬처럼 어지러우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얽혀 있는 것. 그 관계 속에서 찍소리 않고 살아남고 있는 우리는 그럼 변태가 아니고 뭐란 말이냐.
아줌마도 가끔은 때리고 싶다. 장정일이든 장선우든 좃선놈들이든, 그 이니셜의 출처가 뭐가 돼도 상관없는 J란 작자가, 아줌마한테 “너랑 씹하고 싶어”라는 대사를 읊어대진 않겠지만, 만약 그래준다면 군말 다 생략하고 응하겠다. 때리는 거 하나는 아줌마도 잘할 것 같다. 태어나서 보고 배운 게 온통 그거니까. 다 가진 자가 하나 못가진 자 때리고, 그 자가 하나 더 못가진 자 때리고, 때리고, 때리고, 때리는 나라의 때리는 줄 끝에 서서 한번도 제대로 못 때려보고 살아온 아줌마니까.
먼 추억이 짱돌처럼 머리를 친다. 아줌마 아저씨 공통 선배의 결혼식 뒤풀이 자리. 첫날밤에 울끈불끈 잘 서라고 신랑 발바닥을 때려주는 역사적 전통이 되풀이됐지만, 몇 사람 때리는 흉내를 내더니 다음 지원자를 물색하는 순서가 왔다. 꼴보수 아저씨를 패고 싶었던 아줌마는 닭 대신 애먼 꿩이라고, 저요 저요 손들었다. 그랬다가 아저씨 손에 개처럼 잡혀서 집으로 질질 끌려갔고, 두고두고 경쳤다. 몇십년 만에 또 한번 묻는데, 왜 안 돼? 누구 맘대로?
그런 추억까지 되살아난 올 한해, 모든 권력가진 것들에 대한 환멸을 더욱 굳건히 하기로 결심한 아줌마로선, 졸라 가진 거 없이 지네들끼리 때리고 때려주고, 자급자족 해결하는 Y와 J에게 유감을 가질 이유가 하등 없다. 세상에 이런 무해한 인간들만 있다면 장선우 감독이 ‘예술’을 유예하고 ‘싸움꾼’을 자처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아, 어쨌든간에 오늘 아줌마의 수다는 하드고어 포르노 수준이었다. 결론은, 딴죽 거는 유식한 포르노, 장선우만 하냐? 아줌마도 한다, 이거로 낙착봤다.
(검열관님, 자르지 마세요. 이 잡지에 등급외 전용면을 마련하세요. 아냐아냐, 다 보라고 하세요. 아줌마 교복 시절의 장면은 알아서 다 잘랐으니까요. 그리고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두세요. 그럼 아줌마는 해인사 가서 돌이나 닦고 올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