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환타지아2000> 뉴욕 관람기
2000-01-11
글 :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아이맥스극장서 디즈니 걸작 <환타지아 2000>으로 문을 연 미국의 21세기

20세기를 당당히 자신들의 세기로 규정한 미국인들에게 2000년 1월1일은 또다른 미국의 세기가 시작하는 시발점으로서의 의미가 오히려 커 보였다. 그래서인지 미국 전역에서 실시된 특별행사들의 주제도 대부분 그들의 위대한 역사와 밝은 미래를 주제로 하는 것들이었다. 문제는 WTO회의중에 이미 한 차례 폭동을 경험한 시애틀이 새해맞이 행사를 취소한 데 이어, 뉴욕의 타임스퀘어 또한 테러리스트들의 목표가 되고 있다는 뉴스가 그런 밝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것이다. <Late Show>의 데이비드 레터먼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지난 12월29일 방송에서 타임스퀘어 행사에 참가하겠다는 관객을 향해, 새 밀레니엄의 첫 테러 희생자 후보가 된 것을 축하한다는 간담이 서늘한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에도 12월31일 뉴욕의 핵심인 타임스퀘어는 새 천년을 성대하게 맞이하기 위해 별러온 인파들로 인해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아침 9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이후 하루종일 TV를 통해 생중계된 그날의 행사는 크게 세 가지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200만 관중, 8천명의 경찰, 넘쳐나는 관광객이 그것이다. 특히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전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인해 뉴욕은 거의 점령되었다고 언론들이 전할 정도였는데, 단적인 예로 뉴욕 맨해튼에 걸어다니는 사람 중에 영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을 정도. 당연히 그날 행사의 관중은 대부분이 관광객이었고, 진짜 뉴요커들은 가족과 함께 집에서 혹은 조금 조용한 센트럴파크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링컨기념관, 스필버그<끝나지 않은 여행>

뉴욕의 이런 시끌벅적한 새 밀레니엄 행사와는 달리 수도인 워싱턴DC의 링컨기념관 앞에서는 비교적 조용하고 우아한 행사가 열렸다. 대통령 가족을 비롯해 미국 내 상당수 저명인사들이 참여한 이 행사의 제목은 ‘America’s Millennium’. 밤 10시 정각 윌 스미스가 자신의 <윌레니엄>(Willennium)을 부르면서 흥겹게 시작한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20세기의 마지막 20분 동안 전 미국에 <CBS>를 통해 방영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다큐멘터리 필름 <끝나지 않은 여행>(The Unfinished Journey)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크린에 흐르는 영상 위로 존 윌리엄스가 현장에서 직접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선보였고, 빌 클린턴 대통령, 제임스 얼 존스, 퀸시 존스 등 미국역사를 함께 해온 이들이 현장에서 그 위에 내레이션을 입혀 영화의 깊이를 더했다.

<끝나지 않은 여행>은 기록사진들과 필름들을 편집해 만들어낸 20세기 미국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모두 다섯 부분으로 돼 있다. 첫 번째는 이민으로 시작해 현재의 미국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노동자 계급이 일궈낸 위대한 변혁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어 세계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전 등 미국이 피를 흘린 전쟁의 역사가 이어졌다. 다음은 미국의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가 일궈낸 성과들을 정리한 것으로, 그중 할리우드영화 속 명장면들이 이어지는 부분에선 관객의 환호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부분은 노동운동, 흑인민권운동, 여성민권운동 그리고 반전운동 등의 사회혁신의 과정과 라이트 형제, 아인슈타인 그리고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과학발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왜 그들이 20세기를 미국의 세기로 자랑스럽게 규정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 다큐멘터리는 스필버그 감독의 <ET>에서의 장면과 비슷하게 어린이와 어른이 손이 맞잡는 것을 보여준 후, 성조기로 그 끝을 맺었다. 워싱턴DC의 현장에서 혹은 TV를 통해서 이를 보았을 미국인들에게는 무한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스필버그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이 잘 발휘된 또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뉴욕 <환타지아2000>, 성인 취향의 걸작

그렇게 끝이 난 20세기를 뒤로 하고, 축복을 받으며 시작한 21세기의 첫날은 디즈니가 야심차게 선보인 <환타지아2000>으로 시작했다. <환타지아>가 만들어진 지 무려 60년이 지나 선보인 이 새로운 걸작은 지난 12월17일 뉴욕의 카네기홀을 시작으로, LA, 파리, 런던, 도쿄 등 전세계 5개 도시에서 열린 프리미어 투어를 통해 이미 격찬을 받았다. 그런데 이를 통해 충분히 상업성을 입증했음에도 디즈니가 전세계 50개 아이맥스극장에서만 개봉하기로 결정한 사실은, 이 작품에 대한 자부심을 잘 드러내는 사건으로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 때문인지 새해 첫날 맨해튼에서 유일하게 <환타지아2000>을 상영한 소니 아이맥스극장 앞에는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성인관객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미리 예매한 관객 대부분도 20대 이상 성인들로, <환타지아2000>의 소구대상이 기존 디즈니 애니메이션들과는 확연히 다름을 입증했다.

크게 8개 시퀀스로 엮어져있는 <환타지아2000>의 첫 번째 시퀀스를 장식한 것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베토벤 5번 교향곡 <운명>. 파스텔톤으로 추상화된 나비들이 주인공인 이 시퀀스는 악한 나비들이 선한 나비들을 쫓아내는 과정과 선한 나비들이 태양으로부터 다시 힘을 얻는 과정을 그렸는데, 짧지만 강력한 시각효과로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 첫 번째 시퀀스 이후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에 스티브 마틴, 배트 미들러, 제임스 얼 존스, 퀸시 존스, TV시리즈 <제시카 추리극장>으로 유명한 안젤라 란스버리 등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해 다음 시퀀스를 소개함으로써,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관객들 즐겁게 해주었다.

두 번째 시퀀스의 음악은 오토리노 레스피기의 <Pines of Rome>. 로마의 역사를 담은 원곡의 내용과는 전혀 달리 북극해의 고래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 시퀀스에서, 거대한 북극 고래들이 빙하 위의 하늘을 미끄러지듯 날다가 초신성의 폭발과 함께 구름의 바다를 넘어 우주로 솟아오르는 장면이 가장 압권이었다. 3D 컴퓨터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될 만한 이 장면은, 특히 아이맥스가 가져다주는 시각적인 충만감과 어우러져 관객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전의 두 시퀀스가 가졌던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일신한 세 번째 시퀀스의 음악은 조지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 뉴욕의 전설적인 캐리커처리스트인 알 허시펠드의 그림체를 바탕으로 그에게 바치는 일종의 오마주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유쾌한 시퀀스는, 20세기 중반을 살아간 뉴요커들의 꿈과 희망을 담고 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The Steadfast Tin Soldier>를 배경음악으로 한 네 번째 시퀀스는 40년대 <환타지아>가 처음 만들어질 당시 한 디즈니 애니메이터가 그렸던 그림을 토대로 제작돼 화제가 된 시퀀스. 이어 선보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시퀀스들은 모두 관객을 무방비 상태로 웃게 만들기 충분한 것들이었다. 홍학에게 요요를 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황당한 상상에서 시작하는 다섯 번째 시퀀스의 음악은 Camille Saint-Saens의 <Carnival of the Animals>였고, 전작 <환타지아>에서 마법사의 게으르지만 귀여운 도제로 미키를 등장시켜 백미라고 인정받은 시퀀스를 다시 선보인 여섯 번째 시퀀스는 폴 듀커스의 <마법사의 도제>였다. 도널드 덕을 주연으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코믹하게 엮어 가장 큰 웃음을 자아낸 일곱 번째 시퀀스는 에드워드 엘가의 <Pomp and Circumstance>을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두 번째 시퀀스와 함께 <환타지아2000>의 핵심이라고 불릴 것으로 보였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주제를 담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Firebird Suite>로 장엄하게 장식한 마지막 시퀀스는 <환타지아2000>에서 가장 실험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야기와 그림체 모두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한 사슴에 의해 깨어난 봄의 여신이 온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다가, 갑작스러운 화산 폭발로 모든 생명이 불타버리는 엄청난 재앙을 만난다는 이야기. 결국 다시 희망을 찾은 봄의 여신이 흘린 눈물로 인해 잿더미 위에서 생명들이 태어난다는 것이 결말이다. 결국 자연친화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며 끝맺음했던 것.

여하튼 새로운 천년의 문을 연 영화로 <환타지아2000>은 그 자격이 충분해 보였다. 자연, 사랑, 용기, 미래, 웃음, 우주 등 새로운 밀레니엄에는 더욱 중요해질 주제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데다가, 셀 애니메이션과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미래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언제 또다시 새로운 <환타지아>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때까지만이라도 <환타지아2000>이 디즈니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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