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더럽혀지는 인간들이 아름답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그를 만나고 싶었다. 3주 전 나온 김훈의 새 소설 <개>는 맞춤한 핑계가 돼주었다. 2002년 계간지 <문학인>을 통해 김훈과 인터뷰(<밥벌이의 지겨움>(2003) 말미에 전재된 인터뷰)한 바 있는 남재일 대중문화평론가에게 다시 한번 질문자가 되어주길 청했다.
<개>는 수컷 진돗개 보리의 목소리로 사람살이의 꼴을 말한다. 칼이 베고 현이 노래하듯, 개는 물어뜯고 짖는다. 잡고 휘두르는 칼을 지나, 사람의 손끝과 부벼져 울림을 만드는 현(絃)을 거쳐, <개>에 이르기까지 김훈은 살아 있는 살덩이에 자꾸 다가섰다. <개>에서 문장과 문장 틈의 계곡은 얕아졌고 지상에 납작 엎드린 <개>의 후각과 촉각은 확고부동하다.
작가는 무릇 건강해야 하고, 그 건강함이란 홀로 시간을 독대하는 힘이라 믿는 김훈은 일산의 자택 바로 건너편 집 지하실에 집필실을 따로 차려놓았다. 큰 길로 마중나온 그를 따라 집필실 계단을 내려가자 자전거와 등산 장비가 오래된 책들과 섞여 객들을 맞았다. 이순신의 참람한 고독을 그토록 길게 노래하면서도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작가의 책상 위쪽에는 그가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는 천칭이 걸려 있었다. 낡은 분동 한 개가, 김훈이 다 쓴 몽당연필 토막들을 올린 접시의 무게와 평형을 이루는 지점을 버티고 있었다. 우리는 그 천칭 아래에서 김훈이 숱하게 버렸을 ‘생의 하중을 거치지 않은’ 문장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대화를 시작했다.
<칼의 노래>는 팽팽한 시위 같았다. 외줄 위에서 칼의 함성과 칼의 비명은 둔중하게 공명했다. 적의는 독화살이 되어 심장에 와 박히고, 비애가 산탄처럼 허공을 갈랐다. 적을 잃어버린 칼은 살처럼 울고, 살을 놓아버린 현은 칼처럼 긴장했다. 적이 없는 자의, 적의에 찬 비가(悲歌)! 나는 칼의 노래를 그렇게 읽었다.
‘현의 노래’는 슬픈 연가 같았다. 지평선 너머에 두고 온 연인을 찾아가는 나그네의 노래 같았다.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을 지나야 하는 자의 불가해한 행로는 현이 되고 고단한 발걸음은 노래가 됐다. 길이 집이 되고 발이 악기가 되어 운명의 불 속에서 저 홀로 울었다. 연인이 없는 자의 연가! 연인보다 운명을 더 사랑하는 자의 연가! 나는 <현의 노래>를 그렇게 읽었다.
김훈의 진실은 문장에 있다. 거짓도 거기에 있다. <칼의 노래>는 뾰족하게 들이밀고 집요하게 덮었다. 적의와 비애가 끊어질 듯 팽팽했지만 언어는 무심했다. <현의 노래>는 퉁명스럽게 드러내고 고즈넉하게 받아들였다. 그리움과 운명애가 여명의 조수처럼 엇갈렸다. 칼이거나 현이거나 그의 문장은 외줄 타는 광대처럼 공중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어느 한순간 툭 하고 줄이 끊어지면서.....김훈은 미지의 땅에 발을 내디딘 느낌이다.
나흘 전에 <개>를 읽었다.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이란 부제가 붙은 이 작품에서 김훈은 진돗개의 몸속으로 들어가 개의 눈에 비친 인간 세상을 말한다. 개는 치열하게 세상을 흡수하고 나지막하게 얘기한다. 거기에는 가시도 상흔도 없어 보인다. 세계의 풍경은 다만 서러움으로 채색한 수채화 같다. 김훈의 문장은 마침내 전장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사무라이의 칼 같다. 이제 낫이 되어 일상의 양식을 추수하고 싶은 걸까? 단편 ‘언니의 폐경’에서도 그는 일상의 잡스러움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나는 이 미지의 세계를 탐문하고 싶었다. 일산의 작업실에서 두 시간 정도 인터뷰하고, 커피 마시고, 맥주 마시며 도합 다섯 시간을 함께 보냈다. 김혜리 기자가 동행하면서 인터뷰를 도와주었고, 대화 내용을 정리했다.
남재일 얼마 전에 북한에서 열린 작가회의에 다녀오셨는데, 인상이 어땠습니까?
김훈 일반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할 기회는 없었고, 차를 타고 이동할 때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멀리서 봤는데, 나라 전체가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할 꿈을 꾸는 세상 같았어요. 자신이 이 세계에서 처한 위상이나 좌표에 대해서 전혀 무지몽매한 상태랄까.....
남재일 <자전거 여행> 북한 편을 계획한다는 말이 있는데요......
김훈 이번에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걸 확실히 알았지.
살아 있음의 질감을 문장으로 재생한다는 것
남재일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는 역사적 소재로 개인적인 내면세계에 천착해서 우리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장편 <개>와 <언니의 폐경> 같은 단편을 보면 아주 개별적인 세계로 들어간 것 같은데, 어떤 문학적 전환 같은 건가요?
김훈 나는 늘 인간은 개별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가령 인간의 고귀함이나 존엄이 개별성 속에서 구현되지 못하는 한 공허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나는 지금 그 개별성을 넓혀 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북한 작가들을 잠깐 스쳤는데 그들은 인간이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해 할 수 없는 사람이거나 이해하더라도 전혀 표출할 수 없는 사람들이더군. 그들은 인간은 역사적 존재고 공동체적 존재라는 견해를 갖고 있어요. 나하고는 접점을 찾을 수 없는 ‘남’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다만 동질성의 바탕은 있겠지. 가령 모국어라든지, 역사의 전통이라든지 조국 산천에 대한 동일한 감수성 같은.... 그런 동질성의 바탕도 사실은 굉장히 큰 거야. 그러나 개별적 존재에 대한 문제로 넘어오면 나와 그들은 남남이라고 봤어요.
남재일 <칼의 노래> 때도 그렇게 말씀했죠. 그런데 최근 소설의 경향을 볼 때, 인간이 개별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문학적 방법론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언니의 폐경>에서 여자가 오줌 눈다거나 생리하는 부분에 대해 후각과 청각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몸의 감각에 대한 천착이 선배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김훈 이 찰나에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의 내용과 질감을 문장, 문학으로서 재생하려면 몸을 통한 감각, 그리고 수많은 삶을 구성하는 허섭스레기와 같은 디테일을 주워 모을 수밖에 없어요. <언니의 폐경>은 완전히 쓰레기와 같은 세부로만 가득 차 있지 않나? 온갖 자질구레하고 무의미하고 말할 수 없이 하찮아 보이는 디테일들, 여자들의 장신구, 화장품, 패션, 속옷을 끌어모아 그것이 삶의 순간성 속에서 갖고 있는 함의들을 모아놓은 거죠.
남재일 <개>를 쓸 때는 편하게 쓰셨습니까?
김훈 금방 썼어요. 작업을 두 달 했죠. 하루는 일하고 하루는 쉬었지. 난 계속 일을 못해. 작업일은 20일쯤 걸렸죠. 그 전에 물론 구상하고 취재를 했지. 진도에 가서 진돗개의 생태와 습관을 두 주일쯤 관찰한 적은 있어요. 나로서는 굉장히 빨리 쓴 소설이고 글이 내 몸처럼 저절로 풀려 나왔어요. 한번도 다시 고쳐 쓰지 않고 출판사로 넘겼어요. 나로선 즐거운 글쓰기를 경험한 거죠.
남재일 개를 직접 키우나요?
김훈 2년 전 진돗개 수놈을 키웠어. 그 개 이름이 책에 나오는 보리고. 개와의 개인적 인연은 그것이 전부인데, 그 놈의 발을 오래 들여다봤어요. 인간의 발은 다섯 갈래인데 개는 두 갈래야. 진화 과정에서 낙후된 거지. 몇 억 년 전에 그리 됐겠죠. 만져보면 발바닥 굳은살이 탄력이 있는 것이 쿠션이기도 하고 용수철이기도 한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걸로 내가 어느 날 소설을 쓰겠구나 싶었어요.
나의 3인칭 공포증
남재일 <칼의 노래> 문체는 뭔가 뾰족하게 들이미는 힘, 뭔가 숨막히게 덮는 게 있었는데 <개>는 공격할 것도 감출 것도 없는 편안한 상태 같았습니다. 그전에 공중에 부유하던 시점이 땅에 툭 떨어진 느낌이랄까, 덕담하듯이 술술 풀어나가던데.....
김훈 문체의 긴장을 현저히 이완시켜놓고 나로서는 매우 수다스러운 문장을 쓰기 시작한 거지. 일종의 전략인데....내가 원래 작품마다 문체가 다르잖아요.
남재일 책의 주제에 맞는 전략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문체는 전략을 넘어서, 세계관의 반영이기도 하잖습니까? 개의 위치에서 얘기하는 게 편했다는 건 뭘 의미한다고 생각하나요?
김훈 감각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어서 나한테는 좋았지. 개가 우리보다 후각이 200배쯤 발달해 있고 청각이 100배쯤 발달해 있다고 해. 물론 개의 종자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감수성을 갖고 있는 짐승인 거지. 개의 내면에는 우리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풍요롭고 넉넉한 삶의 질감이 축적돼 있음은 아마 틀림없을 거예요. 다만 말을 못하니까 내면에 축적된 삶의 질감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거지.
남재일 그런데 개의 위치에서 지금 말씀하신 질감, 후각의 세계를 가지고 보여주는 것이 결국 인간 아닙니까. 무척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한 듯하고 문체는 이완돼 있고 굳이 뭘 덮어야 할 상황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의 삶의 조건에 대한 비애를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위치이고,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게 이거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김훈 인간의 영원한 문제는 약육강식이야. 인간이 영원히 해결할 수도 승복할 수도 없는 문제지. 그런 인간 세상을 관찰하는 개에게 연민이 있는 거지. 인간의 삶은 어떻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미추 개념을 넘어선 것, 선악미추가 다 합쳐져 있거나 그것들이 갈등하는 복합체임을 드러내려고 한 거지. 내가 쓴 문장 중에 아마 연민의 흔적이 가장 많은 문장일 겁니다.
남재일 <칼의 노래>에서 인간 심연으로 점점 더 잠수할 거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에 <개> 보면서는 여기가 바닥 아닌가, 여기서 앞으로 더 어디로 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김훈 글쎄, 나는 최근에는 글을 안 쓰고 있어요. 뭘 하나 쓰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말았는데 (책상의 원고뭉치를 가리키며) 3인칭 화자가 나오니까, 나는 역시 헤쳐나갈 수가 없더라고. 감당이 안 돼. <현의 노래>는 3인칭이긴 하지만 1인칭에 가까운 3인칭이지. 정말 객관적이고 무자비한 3인칭 글을 써보려니까 나는 안 돼요, 아직은요. 주어가 ‘그’가 나오면, 그가 어떻게 했는지 써야 하는데 ‘그’가 어떻게 했는지 알 수가 없는 거지. ‘나’가 나오면 내가 어떻게 했는지 쓸 수 있는데, ‘그’가 뭔지, 내면과 행동의 작동방식을 모르겠어. 3인칭 공포증이 있는 거지. 그래서 때려치웠는데 나로선 좌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