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플랫폼>이든 <당신의 밤과 음악>이든 아니면 냉장고 CF든 아마 당신은 김세원의 목소리를 한번도 듣지 않고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40년간 라디오로 우리의 귓가를 촉촉히 적시던 그가,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에서 내레이션을 맡았다. 금자의 딸 제니가 자란 뒤에 회고조로 어머니를 돌아보는 형식의 내레이션엔 다큐멘터리 같은, 소설 같은, 라디오 연속극 같은 묘한 분위기가 난다. 인터뷰를 재구성해 김세원의 이야기를 영화 속 내레이션처럼 만들어보았다.
멀리서 귀뚜라미가 들리고, 바람에 갈대가 서걱서걱 쓰러졌다가는 일어나고, 안개 사이로 수은등이 하나둘씩 켜진다. 이윽고 마침내 멀리서 기적이 울리고 폴 모리아 악단의 이사도라 선율이, 기차 바퀴 구르는 소리에 뒤섞인다. 많은 사람들이 머물다 가곤 했던 15분짜리 라디오 프로그램 <밤의 플랫폼> 정경은 아마 이럴 것이다. 사람들은 내 목소리를 첼로 같다고 하기도 하고 안개 낀 밤의 수은등 같다고 하기도 한다. ‘얼마든지 바람에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가 보인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아마 당시 고등학생이었을 박찬욱 감독도 그 플랫폼 주위를 배회하지 않았을까.
“행복하게도 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할까 말까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늦든 빠르든 <김세원의 영화음악실>과 <밤의 플랫폼>을 한 나에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식으로 마음을 추스른다.”
시나리오를 두번 읽었지만 더 생각해보고 싶었다. 여행을 떠난 미국으로 또 전화가 왔다. 영화를 찍기 전 양수리에서 녹음을 먼저 했다. 촬영이 다 끝난 다음 영화를 보면서 다시 녹음을 했다. 내 목소리가 영화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 궁금했다. 오슨 웰스나 리처드 버튼의 목소리, 얼마나 좋았더란 말인가.
“시사회에서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보았다. 그리고 이영애를 보았다. 이영애가 임, 신, 이에요, 할 때 아름다운 얼굴 너머에 깃든 뛰어난 연기력을.”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오랫동안 해서 그런지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수사극이나 법정극도 좋아한다. 로맨틱한 취향도 있지만 내 취향은 조금 드라이하다. 그러니 사람들의 상상은 내버려두어야 한다. 상상과 현실은 얼마나 다르던가. 동아방송국 시절 몇몇 사람들은 상상에 그치지 않고 나를 만나 결혼하겠다고 막무가내로 찾아오기도 했다. 19살 남자애부터 60살 넘은 남자까지 방송국을 찾아왔다.
“사람들은 가라앉고 차분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30도 안 된 나의 어린 나이와 짧은 미니스커트, 쌍둥이 남매가 있는 엄마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싹이 보였던 것 같다. 선생님이 자습하라고 자리를 비우면 급우들에게 몰래 본 영화 이야기를 각색해서 들려주곤 했다. 나는 한국외대 불어과 2학년 때 성우가 되었다. 그래도 <김세원의 영화음악실> 같은 프로그램을 하고 영화 내레이션도 맡게 되리라는 운명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보지도 않은 영화 이야기를 하고 음악을 트는 때도 있었다. 해외여행을 나가서는 영화를 보고 음악이 어느 대목에 나오는지를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내게 해외여행이란 얼마나 대단한 사치였던가. 남들은 모두 내가 아버지가 없는 줄 알았다. 마치 제니처럼 말이다. 쇼스타코비치와 하차투리안에게 배웠고 <자장가> <산유화>를 작곡한 김순남, 월북을 했지만 북에서도 버림을 받고 돌아간 내 아버지는 1988년에야 해금되어 온전하게 내 마음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그전까지 내 마음은 늘 두렵고 어두웠다.
나는 PD의 선곡의 즐거움을 뺏는 여자로 악명을 떨쳤다. 내가 할 이야기에 맞춰 선곡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더 집중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30년 넘게 생방송을 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다. 난 생방송의 긴장을 사랑했다. 판에 먼지가 있어 바늘이 튀면 물 스프레이를 뿌려 닦아야 하고, 만약에 대비해 여분의 판도 준비해야 한다. 모든 게 다 곤두서 있는 생방송. 나는 거기서 오롯이 내 인생의 주인이었다. 드라마 성우로 들어갔지만 그 길은 험난했다. 식모 역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기생 3으로 나와 합창으로 ‘네’ 하는 대사 정도가 내 역할의 전부였다.
프리랜서로 클래식과 유럽 음악을 틀어주는 라디오 DJ로 40년을 일했다. 꼭 방송 중간에 시를 읽는다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발음이 정확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내 모토였다. 40년을 열심히 고생한 내게 나는 벤츠를 선물했다. 내가 나를 위로하지 않으면 누가 날 위하겠는가. 나는 출근하는 아침마다 눈을 마사지하며 ‘고마워, 오늘 하루도 고생해줘’라고 말한다. EBS 이사장 노릇을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내 어렸을 적, 한국전쟁 당시의 피난살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 환란의 한가운데서도 피아노를 사달라고 엄마를 조른 소녀, 김세원.”
(소녀가 엄마에게 피아노를 사달라고 조르자, 엄마는 마분지에 밤새도록 그림을 그린다.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이 그려진다. 소녀는 종이건반을 친다. 김순남의 딸 아니랄까봐 소녀는 뜨겁고 급하고 열정적이었다. 종이건반이 페이드 아웃되면, <밤의 플랫폼> 시그널 음악인 폴 모리아 악단의 <이사도라> 선율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