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웃기는 SF,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2005-08-23
글 : 박혜명

아름답고 푸른 지구가 어느 날 외계인들의 일방적인 계획에 의해 파괴된다면? 오싹하겠지만, 쫄지는 마라(Don’t Panic)! 지구가 터질 때 지구와 같이 터져죽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 지구에 파견 조사 나와 있는 외계인 친구를 미리 사귀어두는 것이다. 물론 당신도 지구가 터질 줄은 미처 몰랐겠고 그 외계인이 (보나마나 지구인처럼 위장하고 살았을 테니) 외계인일 줄도 몰랐겠지만 어쩌다 그 외계인과 당신이 친구여서 우정과 신뢰를 서로 쌓아왔다면 지구가 폭파하기 직전 당신의 친구는 특별히 당신에게만 그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며 “친구, 넌 나와 함께 탈출하자꾸나”라는 인정넘치는 제안을 베풀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런 식의 조언은, 아이작 아시모프나 로버트 하인라인 또는 아서 클라크처럼 SF문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하고 진지한 작가들은 해준 적이 없다. 국내 관객에게는 다소 생소할 영국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조언, 아니 농담이다. 병원 청소부, 닭장 청소부, 보디가드 등 SF소설과는 전혀 무관한 일만 하고 살아온 사람이 쓴 SF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아시모프와 하인라인과 클라크가 바라본 거대하고 심오한 우주를 상대로 황당무계하고 썰렁한 상상력을 만담가의 끝나지 않는 이야기처럼 겁없이 이어가는 블록버스터급 조크다.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히치하이커>)는 더글러스 애덤스의 다섯권짜리 소설 가운데 1권 <안내서에 대한 안내서>를 각색했다. 아서 덴트(마틴 프리먼)는 영국 웨스트컨트리에 사는 평범한 남자다. 그는 평범한 목요일 아침, 철거작업을 하는 노란 불도저가 제 집 앞에 버티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광경을 본다. 그날, 15년을 알고 지낸 친구 포드 프리펙트(모스 데프)가 “지금 동네 우회로 건설에 너희 집이 철거당하는 게 문제가 아니란다. 은하계 초공간 우회로 건설에 지구가 철거당할 판국이다”라는 평범하지 않은 뉴스를 전하며 “나는 베텔게우스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알파 켄타우리 행성에서 온 보고인들이 철거 광선을 작동하기 직전에 극적으로 지구를 탈출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낯선 우주선을 얻어타게 된다. 우주선의 이름은 ‘순수한 마음’. 그 안에는 은하제국 정부의 대통령 자포드 비블브락스(샘 록웰)와 여자 지구인 트릴리언(주이 디샤넬), 그리고 로봇 마빈(워윅 데이비스)이 승선해 있다. 성질 급한 자아도취형 캐릭터 비블브락스가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가운데 다섯 멤버는 은하계 히치하이킹을 시작한다.

SF코미디라는 장르명이 붙을 정도로 <히치하이커>는 웃기는 SF다. 은하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들에게 가장 유용한 도구는 타월이라는 설정이나, 은하계 대통령은 진정한 은하계의 권력으로부터 은하계인들의 관심을 따돌리기 위해 세워지는 쇼맨이라는 이야기 같은 것들은 관객이 따라웃기 쉬운 가장 자극적인 농담에 속한다. 좀더 심오하고 심각한 농담은 불가능 확률 혹은 희박 확률이라는 우주의 원리다. ‘정말 일어날까?’ 싶은 일을 ‘뭐 일어나지 않을까’ 싶도록 속이는 것이 SF의 속성이기는 하지만 원작자 더글러스 애덤스는 우아하고 매너있는 SF들이 그 양자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관습, 즉 독자를 꼼짝없이 주눅들게 만드는 유식한 과학적 설명의 고리를 무시한 채 상상의 나래만 퍼덕거린다. 아서 일행이 탄 ‘순수한 마음’호에는 불가능 확률 방지 시스템이 장착돼 있다. 아서와 포드가 드넓은 우주 한가운데에서 그들의 현 위치로부터 50만 광년 떨어져 날아가고 있는 ‘순수한 마음’호에 덥석 탈 수 있었던 까닭은 어떤 전화번호(276709) 때문인데 그 전화번호는 아서가 예전에 지구에서 살 때 참석했던 파티가 열린 집의 번호이며 그 파티에서 아서는 비블브락스와 트릴리언을 만난 적이 있고 ‘순수한 마음’호에는 비블브락스와 트릴리언이 이미 타고 있었다는 점이 변수로 작용해 아서와 포드는 1/276709이라는 확률로 ‘순수한 마음’호에 들어와 있게 됐다. <히치하이커>는 이렇게 있을 법하지 않은 상황들의 연속이다.

그러다보니 애덤스의 원작은 뚜렷한 기승전결식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입담과 상상력으로 꽉 찬 원작을 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치킨 런>의 작가 캐리 커크패트릭은 드라마에 굴곡을 만들었다. 키스신으로 마무리되는 아서 덴트와 트릴리언의 로맨스, 사이비 교주를 연상시키는 캐릭터 허마 카불라(존 말코비치), 트릴리언이 보고인들에게 납치당해 사형위기에 처하는 설정 등은 영화에만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영화 <히치하이커>는 원작보다 덜 과감하고 더 평범해지기는 했지만 “우리의 바이블은 원작”이었다는 감독 가스 제닝스와 제작자 닉 골드스미스의 말은 어느 정도 믿어도 좋다. 제닝스 감독은 애덤스의 문체가 지닌 재기와 유연함을 소박하고 따뜻한 특수효과로 살려내고 있다. 원작이 말장난만으로 은하계의 끝에서 끝을 종횡무진하는 ‘뻥’이라면 영화는 벽돌 몇개가 움직이는 광경만 보여주며 저게 거대한 우주전함의 외관이라고 우기는 ‘뻥’이다.

막나가는 뻥의 본질을 원작과 공유하고 만들어진 <히치하이커>는 꽤나 낯선 SF영화다. 이 영화는 은하계 행성간을 질주하지만 거대한 은하계 전쟁과 몇 억년의 은하계 역사를 요약해주는 <스타워즈>류의 대서사극도 아니고, 인간인 양 고뇌하는 로봇이 나오지만 <아이, 로봇> <A.I.>처럼 정체성의 정의 운운하는 철학 강의도 아니다. <히치하이커>는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기 위해 설계된 슈퍼컴퓨터 지구가 로키산맥을 칠하는 페인트공과 대서양에 물을 채워넣는 인부가 아니었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거라고 말하는 영화다. 쇼맨십에 능한 은하계 대통령, 행성 크기만한 두뇌 용량을 갖고도 문이나 열어주는 잡무에 시달리다 인생을 비관하게 된 우울한 로봇 캐릭터는 광선검을 들고 은하계를 누비는 영웅보다 친근하고 사랑스럽다.

<히치하이커>는 유쾌한 성격의 소년이 키득거리며 써내려간 일기장 같다. 숭고한 목표라곤 생각해본 적 없는 게 분명한 소시민적인 캐릭터들, <모여라 꿈동산>에서 만날 법한 튀는 특수분장, 따지고보면 우스갯소리라서 금세 까먹어버려도 지장없는 소소하고 황당한 에피소드들로 어느 순간 아득한 우주를 품어버린 SF코미디다. 확률상 불가능한 것들을 방지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는 한, 그리고 그 컴퓨터가 마빈의 우울한 넋두리에 질린 나머지 ‘저걸 듣느니 죽고 말지’ 하며 자살해버리지 않는 한, 아서 일행의 여행길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어느 외계 행성이 쏘아올린 유도탄 두개가 하나는 고래로 또 하나는 패튜니아 화분으로 변해 땅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 일이다. 가능한 모든 상상이 우리가 보지 못한 우주 안에서는 끝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단순한 믿음을 가진 <히치하이커>는 만인의 지지를 받을 만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몬티 파이튼이나 로완 앳킨슨의 코미디 같은 영국식 유머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취향이라면 놓칠 수 없는 영화다.

영화가 만들어지기까지

절대불가능의 프로젝트

샘 록웰(왼쪽)과 감독 가스 제닝스

<히치하이커>는 더글러스 애덤스가 (본인 말에 의하면) 20년 동안 영화화를 추진했던 프로젝트다. 물론 농담이겠지만 실제로 그의 소설이 영화화되기까지는 근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1978년 영국 BBC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해 청취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책으로, 게임으로, 심지어 타월 제작으로까지 이어졌던 <히치하이커>의 영화화는 1996년 시작됐다.

제작사는 스파이글라스, 투자·배급사는 월트 디즈니로 정해졌다. 애덤스는 각본만 다듬으면서 감독이 누가 될까를 기다렸다. 성과없이 허무한 5년이 흐르고 애덤스는 2001년 LA의 한 헬스클럽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영국, 독일, 브라질 등에 애덤스의 기념비가 세워지고, 우주의 하늘 끝 두개의 행성에는 ‘아서 덴트’와 ‘아스테로이드 더글러스 애덤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스파이글라스와 월트 디즈니만 당황했다. 애덤스가 없으니 영화도 엎어지겠군, 이라는 세간의 눈초리를 의식한 관계자들은 서둘러 <치킨 런>의 작가에게 애덤스가 남긴 미완성 각본을 맡겼다. <오스틴 파워> 1편을 끝낸 뒤 합류하기로 예정돼 있던 제이 로치가 “전 프로듀서만 할게요”라며 스파이크 존즈에게 짐을 넘기고, “저도 못하겠어요”라며 존즈 역시 고개를 내저은 뒤 가스 제닝스라는 신인에게 메가폰을 쥐어주었다. 그는 블러, 펄프, R.E.M., 팻보이 슬림 등의 재기넘치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온 감독이었다. 제닝스의 뮤직비디오 제작을 도맡아온 닉 골드스미스가 프로듀서로 붙었다.

오랜 파트너 제닝스와 골드스미스는 두려움보다 자신감을 크게 가졌다. 원작 팬들은 “영국영화에 웬 미국 배우를!”이라며 원통해했으나 샘 록웰과 래퍼 출신의 모스 데프를 여유있게 캐스팅하고 휴 그랜트가 아서 덴트 역이란다, 하는 흉흉한 소문이 곳곳에 퍼질 무렵 영국 시트콤 <오피스>로 안방의 인기를 독차지해온 배우 마틴 프리먼에게 주연을 맡겼다. “우린 크고 비싸고 CG로 도배한 SF는 만들지 않을 거예요. 원작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할 거예요”라는 다짐을 확신에 넘쳐 하고 다녔다는 제닝스와 골드스미스는 영화가 채 완성되기도 전에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그린 콘티가 진짜 멋있거든요? 영화에 안 들어간 장면 중에 죽이는 게 더 많아요”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이 기사가 나간 뒤 어떤 이들은, 하긴 ‘영화화 절대 불가능’이란 딱지가 붙을 만큼 까다로운 원작에 저 둘이 괜히 덤볐겠느냐, 다 배짱 아니겠느냐, 라며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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