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복수 삼부작에서 복수는 가족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복수 삼부작을 다시 보면서 생각했는데, 나로서는 다소 ‘뜻밖’이었다.
박찬욱의 주인공들에게 가족은 ‘가장 나종 지니인 것’처럼 보인다. 내 딸의 죽음(<복수는 나의 것>)과 내 누나(<올드보이>)의 자살, 내 새끼에 대한 살해(<친절한 금자씨>)는 사무치는 원한을 만든다. ‘내’라는 말은 참 무섭다. 가족은 가족의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목격한다. 이우진은 다리 위에서 누나의 손을 놓고, 어버이는 아이들이 살해되는 비디오를 보며 송강호는 딸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듯 떠올린다. 심지어 장기밀매업자의 하수인처럼 보이던 청년은 칼에 목을 찔리고 피를 내뿜으며 한마디 던진다. “엄마…”. 장기밀매업자도 허걱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이처럼 박찬욱의 주인공들은 탄식한다. “모쿠슈라…”. 알다시피, 복수 삼부작의 ‘모쿠슈라’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프랭키와 매기처럼 스스로 만든 ‘모쿠슈라’가 아니다. 박찬욱마저도 처절한 복수를 현실감 있게 재현하려면 혈육의 상실을 통해야 한다. 음….
복수의 씨앗은 가족의 죽음뿐
그리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복수의 제1원칙이다. 내 딸이 죽었으므로 너의 연인이 죽어야 한다. 내 누나가 자살했으므로 너의 딸이 고통받아야 한다. 내가 고통받았으므로 너는 죽어야 한다. 아무리 복수의 칼을 갈아도 가족이 죽지 않으면 복수할 자격에 미달이다. 가족을 잃은 자에게 복수를 양보해야 마땅하다. 금자씨는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우기기를 포기하고, 복수는 너의 것이라고 인정한다. 금자씨의 친절한 양보의 이유는 금자씨의 딸은 살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백 선생은 복수 삼부작에서 유일한 순수악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나의 원한은 너를 죽임으로도 갚아지지 않는다. 복수를 완수한 이우진은 자신의 머리에 총구멍을 내고, 끈질긴 고투 끝에 ‘복수를 나의 것’으로 만든 송강호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는다. 금자씨는 남이 수행한 나의 복수 앞에서 울 듯 웃을 듯 미간을 찡그린다. 박찬욱의 복수극이 ‘내’ 것에 집착하는 정서를 극한으로 밀어붙임으로써 한국의 가족주의를 비판하는지 아닌지는 모호하다. 아니 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동서고금을 통틀어 복수의 알리바이는 언제나 내 혈육의 살해를 통해서만 제공될 수밖에 없는지를 되씹게 된다. 그것이 한국의 한계인지, 인간의 한계인지, 영원한 한계인지 말이다.
복수 삼부작은 복수 심리의 비극적 진화과정을 보여준다.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에 대한 자의식으로 가득하다. 송강호는 자문한다. “누구한테 원한을 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날.” 그리고 “너 착한 놈인 줄 안다. 그러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며 괴로운 복수를 수행한다. <올드보이>에 오면 복수의 자의식은 사라진다. 더이상 ‘왜’냐고 묻기를 멈추고, ‘어떻게’만을 생각한다. 이제 세치 혀의 간사한 놀림도 처절한 복수의 충분조건이 된다. 복수의 관성은 복수의 연쇄고리를 지나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복수를 말리는 미도를 뿌리치며 오대수는 선언한다. “복수는 내 성격이 됐다”고. 이처럼 복수를 다짐하는 자는 복수 기계가 된다. 그리고 금자씨는 시간에 쫓겨 웅변을 끝내야 하는 변사처럼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라며 서둘러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신하균은 속죄하지 않아서 응징당했을까? 약간 어리둥절하다.
원한은 복수로 풀리지 않는다
복수의 진화과정에 대한 촘촘한 묘사에 비해 금자씨의 윤리학 강의는 조금 허술하다. 새롭지 않다. 나는 복수 삼부작이 복수에 눈이 멀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기나긴 조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은 복수의 허무함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결국 복수의 세계에서는 어느 누구도 웃지 못한다(“웃어라 세상이 너와 같이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복수는 어느 누구의 것도 되지 못하고, <올드보이>의 올드보이는 복수를 완성하고도 자신의 머리에 총구멍을 내고,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씨는 케이크에 자신의 머리를 처박는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원한은 복수로 풀리지 않는다. 너무 뻔하지만 자주 잊는 교훈이다.
마지막 추신. 박찬욱 영화에서 스타일이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는 없다. 박찬욱의 영화가 스타일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해도, 대중은 박찬욱 영화의 스타일을 소비한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장기밀매업자의 후줄근한 사무실보다 이우진의 세련된 펜트하우스가, 후줄근한 작업복보다 ‘새끈한’ 양복이 관객의 시선을 만족시키는 동력이 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관객은 절절하지만 촌스러운 복수극보다 사소하지만 세련된 복수극에 열광한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 사이에는 스타일의 차이가 있고, 흥행의 차이도 있다. <친절한 금자씨>는 알다시피.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복수는 나의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