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영화인생의 초행길에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황정민
2001-07-25
글 : 황혜림
사진 : 이혜정

어디쯤 그 수줍은 드러머 아저씨를 품고 있는 걸까. 서른 중반 즈음에, 후미진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무대 구석에서 드럼을 두드려대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강수. 삼류밴드의 고단한 일상을 술과 대마초로 위로삼다 결국 밴드를 위해 떠나가는 우직하고도 여린 드러머 말이다. 여름해가 질 무렵, 대학로 명필름 사옥에서 만난 황정민에겍서 한눈에 `강수`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짧던 머리가 단발로 길고, 입가에 수염이 많이 자란 얼굴. 더구나 카메라 앞에서 바지를 둥둥 걷고 선뜻 맨발이 돼버리는 품새까지, 그는 한결 거침없고 분방한 활기에 넘쳐보였으니까. `강수`는 지난 1년 사이 황정민이 맞닥뜨린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다.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가 그의 실질적인 영화 데뷔작이기 때문. 지난해 가을에 열린 `지상최대의 오디션`에 참가하기까지 그는 영화의 객석에 있었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옆으로 서보시죠”하고 말을 건넨 임 감독이 그의 얼굴에서 강수를 찾아냈다. 재미있는 우연 하나는, 그의 아버지가 과거 미8군에서 취미로 드럼을 연주했다는 사실. 악영향을 걱정한 어머니가 그만두게 해서 공연을 본 적은 없지만, 어릴 때 드럼 스틱으로 맞은 기억만은 생생하다. 드럼을 쳐본 적도 없는 그에게, 2달 안에 영화 삽입곡들을 연주할 수 있도록 악기를 익혀야 하는 것은 가장 큰 부담이었다. “큰 쟁반, 작은 쟁반, 큰북, 작은북, 왼손, 오른손, 왼발, 오른발 하는 식으로 나만의 악보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연습에 몰두하는 그를 본 아버지는 딱 한번이지만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영화 출연은 거의 처음이지만, 연기는 그에게 아주 오랜 꿈이다. 극장 입장료가 150원하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틈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극장으로 달려가 은막에 투사된 빛에 넋을 잃곤 했다. 그러다가 중3 때 뮤지컬 <피터팬>에서 “날아다니는 윤복희 아줌마”를 보며 연기를 하겠다고 맘먹었고, 그런 그에게 어머니가 먼저 계원예고 원서를 건넸다. 예고 연극과에서 첫걸음을 뗀 연기의 꿈은, 3학년 때 벌인 사고(?)를 거름삼아 더욱 굳어졌다. 친구들끼리 주머닛돈을 털어 극단을 만들고, <가스펠>이란 뮤지컬을 기획해서 1달 공연으로 계몽아트홀에 올렸다가 관객이 거의 없어 펑펑 울며 보름 만에 간판을 내린 것이 사고의 전말. 빚만 800만원이 남는 바람에 결국 부모님들에게 한바탕 얃단을 들은 뒤 일부를 갚고, 남은 빚은 제비뽑기로 금액을 나눠 두고두고 갚았다.

일찌감치 연기의 배고픔을 알았기 때문일까. 사고의 여파로 재수를 해서 서울예대를 다니고, 졸업 뒤 학전에서 연극을 해오는 동안에도 그는 포기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95년 <지하철 1호선>의 익살스런 캐릭터 `문디`를 시작으로 <개똥이><의형제><캣츠><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이 그가 거쳐온 작품들. 버젓한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 심지어는 부모님들도 연극으로 얼마나 버냐고 답답해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강수를 이해하는 것도 그런 이유 같아요. 나 나름대로, 강수나름대로 잘살고 있는 건데, 답답해보일 수 있잖아요. 사는 방식의 차이죠.” 그래서 <와이키키...>의 강수는, 한동안 벗어나기 힘들 만큼 애착이 갔다. 그렇게 먹은 나이가 서른둘, 그는 새로운 시작에 서 있다. 스크린으로 본 자신의 연기가 무척 쑥스러웠다면서도, 처음의 열정이 세월에 바랄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리고는 “숀 코너리처럼 멋지게 늙어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은데, 그냥 일이라고 도장찍으며 할 게 아닌 것 같아요. 즐기면서 잘할 수 있는 여유를 찾는 게 요즘의 고민”이라고. 막 크랭크인했다는 그의 두번째 영화에서, 앞으로 다가올 세 번째, 네 번째 영화에서, 이 중고 영화신인의 해법을 지켜보는 재미도 적잖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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