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zombie)’란 부두교에서 일컫는 ‘살아 있는 시체’의 이름으로, 초자연적인 방법이나 마약 등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자를 뜻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전적인 정의와는 별도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좀비는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괴물들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서의 좀비는 괴전파, 약물, 주문, 바이러스 등의 온갖 방법을 통해 되살아난 시체들(이들은 반드시 백골이 되기 전인 절반쯤 썩은 상태이기 마련이다)로, 인간의 살을 뜯어 먹거나 물어 죽이는 무시무시한 식인 괴물이다.
이러한 ‘식인 괴물’로서의 좀비 이미지를 구축한 영화가 바로 공포 장르의 거장으로 꼽히는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다. 공포 영화를 진지한 비평적 관심의 대상으로 격상시킨 걸작이자 호러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이 영화를 통해 좀비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포 캐릭터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또한 그 속편인 <이블 헌터>(1978)와 <죽음의 날>(1985)를 통해 좀비는 자아를 상실한 채 휩쓸려 다니는 현대 사회의 대중을 상징하기 시작하면서 단순한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한 단계 올라선 존재로까지 격상했다.
오는 9월 2일 국내 극장가를 찾는 영화 <랜드 오브 데드>는 로메로의 ‘시체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다. 이번에는 세상을 지배한 좀비들을 막기 위해 두터운 방벽을 친 도시에서 상류층과 빈민층이 갈등하고, 점차 의사소통과 학습을 할 수 있게 진화된 좀비들이 더욱 위협적인 공격을 펼친다는 내용이다. 그야말로 로메로 식 좀비 월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설정의 이 영화는 90년대 이후 부진을 면치 못했던 로메로가 다시 한 번 자신의 본령으로 돌아와 야심차게 선보인 주목작이기도 하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정통 좀비 호러의 기대작 <랜드 오브 데드>의 공개를 맞아, DVD Topic에서는 DVD로 만날 수 있는 좀비 관련 영화의 대표작들을 소개한 기사를 마련했다. <랜드 오브 데드>를 보기 전에 이들 영화를 몇 편이라도 감상해 둔다면 보다 흥미로운 관람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 작품도 일부 있지만, 가까이에 공포 영화 팬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할리우드의 좀비 영화
<화이트 좀비> - White Zombie (1932)
좀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최초의 영화. 엄밀히 따지자면 이 영화에 나오는 좀비들은 식인 괴물들이 아니라 악한에 의해 최면이 걸린 채 조종당하는 노예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일반적으로 인식된 좀비들보다 오히려 더욱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설정에 가까운 좀비들이다(영화의 배경 역시 아이티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남의 약혼녀를 너무나 사모한 나머지 좀비로 만들어 가지려는 한 어리석은 남자의 욕망에 기인한다. 때문에 영화의 핵심은 좀비 보다는 등장인물 간의 갈등에 더욱 집중되어 있고, 좀비들은 감정 없이 조종자가 내리는 지시만을 충실히 따르는 로봇처럼 묘사되었다.
<드라큘라>로 불멸의 호러 아이콘이 된 명배우 벨라 루고시가 인간을 좀비로 만드는 악역을 맡아 열연했으며, 극중 루고시가 최면을 걸거나 좀비를 조종하기 위해 선보였던 독특한 손동작은 훗날 팀 버튼 감독의 <에드 우드>에서 그대로 재현되기도 했다. 지금 본다면 조금 심심할 수 있으나, 몽환적이고 시적이기까지 한 분위기와 흑백 영화 특유의 느낌은 여전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국내 미출시, Roan Group )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 Night of the Living Dead (1968)
<이블 헌터> - Dawn of the Dead (1978)
<죽음의 날> - Day of the Dead (1985)
이 영화들이 없었다면 <랜드 오브 데드>도 없었다! 아마 이 한 문장으로도 조지 로메로의 기념비적인 3부작(지금은 4부작이 되었지만)의 무게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농장에서 시작, 점차 인간을 압도해 버린 좀비들의 세상이라는 묵시록적 배경으로 편을 거듭하면서 확장되는 세계관은, 단순히 괴물이 나오는 저예산 공포영화에서 인간 사회에 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담긴 서사시로 변하는 과정과도 같다.
지상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인간들은 점차 살기 위한 본능만 남아 가는 추악한 존재들로 퇴화되어 가고, 척살의 대상일 뿐이었던 좀비들은 점차 학습을 통한 진화를 시작한다는 이 3부작의 전개는 좀 더 조직화된 좀비들이 등장하는 4편 <랜드 오브 데드>를 통해 더욱 심화된다. 좀비 영화를 보고자 한다면, 어쨌든 이 3편을 피해갈 생각은 하지 말자.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 알토미디어 / 이블 헌터 - 리스비전 / 죽음의 날 - Anchor Bay Entertainment, 국내 미출시)
<드릴러> - Thriller (1983)
지금은 잇따른 스캔들과 재판 등으로 ‘깡통을 찬 신세’가 되었지만, 존 랜디스 감독이 연출한 이 뮤직비디오가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마이클 잭슨은 온 세상이 자기 것만 같았던 슈퍼스타였다. 그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뮤직 비디오 가운데 한 편인 <드릴러>는 곡 자체의 카리스마가 뛰어난 안무와 특수 분장으로 구현된 고품질의 영상과 상승효과를 이룬 결과물이다.
좀비는 물론 늑대 인간도 등장하며, 빈센트 프라이스의 불길한 웃음소리가 삽입되는 등 공포 영화의 전반에 대한 인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좀비의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와 동작을 집단 안무로 활용한 아이디어는 지금 보아도 ‘역시’ 라는 반응을 이끌어낼 만하다. 특수 분장의 거장 릭 베이커가 참여하여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으며, 좀비로 분장하여 출연하기도 했다. DVD <마이클 잭슨: 히스토리 Vol. 1>에 수록되었다. (소니 뮤직)
리-애니메이터 - Re-Animator (1985)
H.P 러브크래프트의 원작을 영화화. 이 영화에 나오는 시체들은 일반적인 좀비들의 특성과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이 시리즈는 죽은 자를 살리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더 흡사한 면이 있다. 속편은 제목부터가 노골적으로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 <리-애니메이터>는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와 함께 80년대 대표적인 스플래터 무비답게 시종일관 피범벅과 신체 훼손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 영화가 다른 좀비 영화들과의 유별난 차이점이 있다면, 되살아난 시체들의 광란보다 오히려 매드사이언티스트 허버트 웨스트란 캐릭터의 카리스마에 있다(이것은 배우 제프리 콤즈의 매력이기도 하다).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는 그의 불타는 의지로 모든 사건이 일어나며, 주변이 되살아 난 시체로 득실거려도 그의 행동과 의지는 항상 일직선이다. 이런 캐릭터의 사이코적인 기질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마냥 즐겁다.
신체 훼손의 수위도 만만치 않아 고어 팬들을 들뜨게 하며, 작품 전체에 녹아있는 유머 역시 탁월하다. 이미 히치콕의 <싸이코> 메인 테마를 디스코 풍으로 편곡해서 사용할 때는 자신이 어떤 성격의 영화인가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피범벅과 유머, 그리고 떨어진 목이 여자를 유린하는 변태적인 장면 연출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명작이다. (국내 - 리스 비전 / 해외 - Elite Entertainment)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 Night of the Living Dead (1990)
<이블 헌터>와 <죽음의 날>에서 소름끼치도록 실감 나는 특수 분장과 효과를 보여주었던 톰 사비니가 직접 감독을 맡은 작품이다(로메로는 각본을 담당). 제목 그대로 1968년작의 리메이크다. 비교적 충실하게 다시 만든 영화지만, 오리지널의 살생부를 약간 뒤바꿨고 터프한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등 주요한 몇몇 차이점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도 흑백 화면과 저예산이라는 한계 때문에 의외로 노골적인 잔혹도는 낮았던 오리지널에 비해, 발전된 기술로 구현된 유혈 장면을 컬러 화면으로 본다는 점이 의외로 강한 인상을 남긴 영화다. 하지만 오리지널을 뛰어난 작품으로 만든 심도 있는 정치적 테마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소니 픽처스)
데드 얼라이브 - Brain Dead (1992)
지금이야 ‘이런 작품을 만들던 시절도 있었나?’하고 신기해하겠지만, 피터 잭슨이 처음 <반지의 제왕>을 영화화한다고 나섰을 때는 ‘<데드 얼라이브> 감독이 웬 판타지?’하던 반응들이 더 많았다. 그만큼 이 작품은 피터 잭슨의 초기 작품들 중 가장 널리 알려졌으며 한때는 그의 대표작이기까지 했다.
열렬한 호러광의 작품답게 줄거리는 <싸이코>와 <이블데드>를 합쳐놓은 식인데 폭압적인 어머니 밑에서 사는 주인공이 뉴질랜드의 평화를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좀비들을 싹쓸이하는 것이 주된 내용. 여기에 로맨스와 쿵푸영화가 양념으로 곁들여져 있으며 배꼽 터지는 코미디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전설이 된 이유는 영화 역사상 가장 잔인한 영화 중 하나로 완성되었기 때문. 사지절단과 신체훼손은 기본이고 아동학대(단순히 학대 수준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와 좀비들 간의 성행위가 보는 이를 아찔하게 한다. 놀라운 것인 이 모두가 절묘하게 코믹한 연출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입가에는 낄낄대는 소리가 나오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만든다. 원래는 뉴질랜드에서 <브레인데드>라는 개봉으로 공개된 작품. <데드 얼라이브>는 미국 공개판 제목이다. (국내 미출시, Vidmark/Trimark)
레지던트 이블 - Resident Evil (2002)
레지던트 이블 2 - Resident Evil: Apocalypse (2004)
호러 영화는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B급 장르로 취급받는 것이 현실이지만 게임의 세계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잘 만든 호러 게임은 게이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장씩 팔려나가 제작사들의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준다. 캡콤의 인기 게임 <바이오 해저드> 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로, 폐쇄된 공간에서 괴물들과 싸우는 ‘서바이벌 호러 게임’ 장르를 개척한 명작 게임이다. 이를 <이벤트 호라이즌>의 폴 앤더슨이 영화화한 <레지던트 이블>은 게임의 미스터리적인 요소와 건액션을 잘 차용해 꽤 즐길만한 구석이 많은 작품이다.
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 속의 좀비는 그야말로 주인공들의 ‘밥’인데 이는 전편보다 더욱 스케일이 커진 <레지던트 이블 2>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된 앨리스와 게임 속 주인공이기도 했던 질 발렌타인은 덮쳐오는 좀비 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작살낸다. 게임 세대가 만든 좀비의 새로운 양상이랄까. 참고로 <레지던트 이블>은 <바이오 해저드>의 미국식 제목이다. (스펙트럼 발매)
<새벽의 저주> - Dawn of the Dead (2004)
<이블 헌터>를 리메이크한 작품. 식인 좀비들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설정을 고스란히 현재로 옮기고, 여기에 고출력의 스피드와 오리지널 못지않은 강렬한 유혈 묘사를 더했다.
특히 최근의 좀비 영화들에서 하나의 경향으로 굳어진 ‘달리는 좀비’의 등장과 정치성의 배제는 오리지널의 지지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부분이기도 한데, <하우스 오브 데드>나 <레지던트 이블>과 같은 비디오 게임에 익숙해진 세대들에게는 오히려 21세기의 유행에 맞는 새로운 좀비 이미지를 제시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또한 좀비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느끼는 출구가 없는 공포감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오리지널에 비견되는 정서적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웬만한 액션 영화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 총격과 폭발의 묘사가 압권인데, DVD의 뛰어난 사운드를 통해 극장에서의 박력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다. (유니버설)
유럽산 좀비들
좀비 - Zombi 2 (1979)
이태리 고어 영화의 왕 루치오 풀치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 이 영화는 그에게 있어 일종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 이유는 그가 피철철 사지절단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첫 영화이기 때문이다. 늘 기회 포착을 잘했던 풀치는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이 이태리에서 <좀비>로 개봉이 됨에 따라 재빨리 <좀비 2>라는 제목으로 내놓아 재미를 본다.
일종의 졸속 제작이기 때문에 각본이나 배우들의 연기, 또 로메로 영화와 같은 깊이란 조금도 없다. 하지만 풀치의 모든 명성은 '고어 장면'에서 비롯되었고, 이 영화는 그 목적을 충실히 달성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눈알 조지기'의 스펙터클을 비롯해 영화 곳곳에서 잔혹한 장면들이 줄을 잇는다.
특히 바다 속에서 벌어지는 좀비와 상어의 대결 장면은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다. 오직 풀치 팬들만 환호하며 볼 수 있는 영화! 국내 발매된 DVD 타이틀은 최악의 한글 자막이어서 그 또한 희귀한 체험이 될 듯. 해외판은 2장으로 나온 25주년 기념판을 추천! (세일 DVD / 해외 - Media Blasters, Inc)
비욘드 - The Beyond (1981)
루치오 풀치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고어 장면 외에는 볼 것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지만, <비욘드>는 예외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싸구려 에로에서 서부극, 심지어 댄스 영화까지 두루 섭렵한 풀치의 다작 필모그래피에서 군계일학의 존재다. 이 한 편의 영화에 풀치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최고 걸작이라는데 반론의 여지가 없지만, 어디까지나 풀치 영화에 제한됨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루이지애나 호텔 지하에 지옥으로 통하는 7개의 문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함께 벌어지는 좀비들의 습격. <나이트메어 콘서트>를 제외하면 <비욘드>는 풀치 영화에서 가장 잔인무도한 영화로 오랜 시간 명성을 떨쳤다. '눈알 조지기'는 세 차례나 등장하며 고어 팬들을 열광시키며, 이전에 만든 영화들 모두 합친 것 보다 더 스펙터클한 피의 세계를 보여준다. 왜 고어 영화의 왕인가는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비욘드>의 가치는 음울한 분위기 묘사에 있다. 특히 마지막 지옥문이 열리고 난 후의 초현실적 풍광은 가히 압도적이라 할 만 하다. 훗날 쿠엔틴 타란티노의 열광적인 찬사로서 더욱 유명세를 떨쳤다. 특히 앵커베이에서 나온 한정판 DVD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국내 - 세일 DVD (삭제판) / 해외 - Anchor Bay Entertainment)
데몬스 - Dèmoni (1985)
데몬스 2- Demoni 2 (1986)
<28일 후>나 <새벽의 저주> 같은 최근 작품에서는 좀비들이 스피디하게 그려져 있지만 이전까지는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에 단체행동이 좀비들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다. 그러한 ‘편견’을 불식시킨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태리산 좀비 영화 <데몬스> 시리즈다. 시커먼 피부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떼거리로 달려드는 이들 좀비들은 보기만 해도 아찔할 지경이다. 서서히 조여드는 공포감 대신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보는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영화 속에서 좀비가 발생하는 이유다. 극장 안의 살육전을 그린 1편에서는 괴상한 가면에 긁혀 상처가 난 것을 계기로 모종의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게 되는데, 영화를 연출한 람베르토 바바가 자신의 아버지 마리오 바바가 만든 걸작 <사탄의 가면>을 오마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편의 경우 TV 속에서 악령이 튀어나오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링>의 사다코 장면과 흡사하여 일각에서는 그 원조격인 작품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국내 미출시, Anchor Bay Entertainment)
프레무토스 - Premutos(1997)
사실상 피터 잭슨의 <데드 얼라이브>는 고어 영화의 종지부를 찍은 작품이다. 어떤 식으로 상상을 하건 잔디 깎기 기계로 사방을 에워싼 좀비들의 몸 전체를 갈며 주변을 피바다로 만드는 그 이상의 것이 불가능하다. 20세기 가장 잔혹한 영화로 <데드 얼라이브>를 꼽는데 그 누가 딴죽을 걸 수 있을까? 물론 이 후 몇몇 작품들이 철옹성 같은 아성에 도전을 했고, 그나마 그에 근접 한 영화가 독일에서 만들어진 <프레무토스>다.
이 영화 역시 상식을 벗어나 한번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강한 의지 하에 만들어졌음이 느껴진다. 황당함으로 치면 이 영화가 몇 배는 더 앞설 것이다. <프레무토스>는 선배 난도질 영화에서 등장했던 온갖 연장들을 총동원해 어마어마한 살육을 벌인다. 더욱이 감독이 열렬한 오우삼의 팬인지 쌍권총으로 좀비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장면까지(카메라 앵글까지 비슷하다), 막가파 정신의 극한을 보여준다. 또한 이 영화는 불경스럽게도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좀비들의 대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고 있어 벌어진 입을 다물 길이 없다.
워낙 많은 사상자가 쏟아지기 때문에 몇 명을 죽였는지 헤아릴 길이 없는 이들을 위해, 영화가 끝나는 순간 총 바디 카운트를 정리해주는 친절함을 베풀고 있어 더욱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국내 미출시, Seduction Cinema)
무덤의 사자들 - Tombs of the Blind Dead (1971)
작년 <새벽의 저주>가 개봉이 되었을 때 일부 관객들이 왜 좀비가 느릿느릿 걷지 않고 미친 듯이 뛰어 다니는지 대해 불만을 터트린 적이 있다. 그건 정말 좀비 영화를 모르고 하는 말씀! <새벽의 저주>가 나오기 한참 전에 좀비들은 이미 고속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람베르토 바바의 <데몬스>와 루치오 풀치의 <좀비 3>는 그 대표작이며 <바탈리언>에서는 좀비들끼리 협동 작전을 펼쳐 식량 확보를 하는 지능적인 모습도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이들 영화가 나오기 전에 참으로 황망한 좀비 영화가 스페인에서 제작이 되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를 배경으로 전쟁에서 처참하게 죽은 기사들이 좀비로 부활한 <무덤의 사자들>이 그 주인공이다. 여기서 좀비들의 특징을 간파할 수 있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 바로 말을 타고 달리는 좀비들의 등장이다. 이들은 눈까지 멀어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청각에 의지를 하며 사람을 공격한다.
이 영화가 다른 좀비물에 비해 흥미로운 것은 마구잡이로 사람을 뜯어먹는 잔혹물의 성격이 아니라, 분위기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는데 있다. 정말이지 말을 타고 달리는 좀비들의 모습에서는 엄숙함마저 느껴진다. (국내 미출시, Anchor Bay Entertainment)
악령의 늪 - Le Lac des morts vivants (1980)
레즈비언 뱀파이어 시리즈로 소수의 열광적인 팬들을 가진 장 롤랭 감독. 그는 뱀파이어 영화로 유명하지만, <좀비 레이크>로 한 때 좀비 영화에 도전을 한 바 있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졸작 영화이지만, 다른 좀비 영화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나름 인기 있는 작품이 되기도 한다.
무대는 프랑스의 한적한 시골 마을. 평화로운 이곳에 전쟁 중 죽음을 당하고 호수에 잠들어 있던 독일군 병사들이 부활, 마을을 습격한다. 매력적인 스토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이 영화에는 매우 애절한 사연이 있고, 그것이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좀비 병사 가운데 한 명이 과거 이 마을의 처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는 애를 가졌던 것이다. 좀비가 된 아빠와 식량인 딸과의 운명적인 만남! 나름대로 드라마틱한 내용이지만, 그렇다고 시대의 졸작이 평작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좀비 레이크>의 가치는 수중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는 좀비들의 표현에 있다. 여유롭게 호수 밑바닥을 노니는 그들을 보면, 좀비에 대한 기존 학설이 모두 깨지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더욱이 배경에 삽입되는 음악의 센스란...(-_-) 순간적이나마 뽀뽀뽀를 보는 듯한 착각이 일어난다. (국내 미출시, 이미지 엔터테인먼트)
아시아 좀비 영화
강시선생 - 疆屍先生 (1985)
한 때 대유행을 했던 강시 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 하지만 하나가 히트하면 아류작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던 당시 홍콩 영화의 고질적 병폐 덕분에, 순식간에 잊혀진 비운의 영화다.
유관위가 메가폰을 잡은 <강시선생>은 홍콩 영화 50주년을 기념하며 제작이 된 작품이다. 홍금보의 호러 3부작(귀타귀, 인혁인, 인혁귀)에서 영향을 받은 영화는, 한 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실은 철저한 벤치마킹을 통해 만들어진 영화다. 이를테면 잘 만들어진 선배 영화들의 정수만을 취해 자신의 스타일로 녹여내고 있는 것이다. 숱한 아류작들을 양산케 한 주인공답게 <강시선생>은 걸작으로 손색이 없다. 이는 작품의 만듦새가 완벽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분명 허술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영화가 담고 있는 액션과 호러, 코믹적인 요소들의 균형이 오락 영화로서는 거의 정점에 오른 모습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수많은 강시 영화 가운데 단 하나의 ‘걸작’으로 칭할 만 하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구성과 속도감 있는 진행이 돋보이며, 무엇보다 액션이 출중한데 이는 홍금보의 액션 팀인 ‘홍가반’의 공로다. 극중 영환도사로 분한 임정영과 강시로 연기한 원화가(둘 모두 홍가반 소속) 무술 지도를 맡아 호쾌한 액션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호화 캐스팅도 빠질 수 없는 볼거리. 영환도사 이미지로 각인된 임정영은 모든 강시 영화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고, 그의 제자로 분한 <미스터 부> 시리즈의 허관영, 당시 떠오르는 스타였던 전소호와 이세봉이 가세하고 있다. 물론 흉측한 외모로 강시 역할을 하며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원화도 홍콩 무술 영화 팬들에게 익숙한 배우다. 80년대 중반 삐짜 비디오와 극장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던 이들에겐 추억의 작품. (스펙트럼 발매)
정크: 사령 사냥 - JUNK~死霊狩り (2000)
육감적인 몸매의 사키를 주축으로 한 보석강도단이 은신처로 마련한 폐공장에는 미군 부대가 실수로 만들어낸 좀비들이 있었다! 과거 모 공포영화 동호회 상영작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일본 B급 영화의 수작. 비디오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특수효과와 액션이 꽤 그럴싸한 작품이며 잔혹도 역시 이태리 호러 뺨칠 정도로 높아 취향이 맞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쾌작이다.
주인공 사키 역을 맡은 시마무라 카오리는 일본에서 ‘왕가슴’으로 유명한 모델. 그녀의 영화 출연과 함께 당시 맹위를 떨쳤던 ‘러브’ 컴퓨터 바이러스가 영화 속에 미리 예언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홀딱 벗은 여자 좀비가 ‘I love you’라는 메시지로 미군 컴퓨터를 무력화시키는 놀라운 장면이 바로 그것. 내용과 전개가 <바이오 해저드>와 흡사해서 게임을 영화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었을 정돈데, 어쨌든 오락성 하나는 보장한다고 할 수 있다. (파이오니어LDC, 국내 미출시)
<버수스> - Versus (2000)
인디펜던트 감독이었던 기타무라 류헤이를 단숨에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린 출세작. 조폭물, 격투물, 좀비물 등의 온갖 장르를 뒤섞은 ‘잡탕’이지만 젊은 감독 특유의 엄청난 에너지가 화면을 가득 채운 신나는 영화다. 탈옥범과 한 여자, 그리고 그를 잡기 위한 킬러들이 죽은 자들을 좀비로 만들어 되살아나게 하는 괴상한 숲 속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결전을 벌인다는 내용. 이 영화에서의 좀비는 그야말로 ‘살아난 시체(living dead)’ 그 자체의 정의에 충실한 존재들로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특성상 무자비한 신체 훼손의 대상이 된다.
혼합 장르 영화의 수작으로, 세계 각국에서의 영화제 상영과 DVD 출시를 통해 장르 영화 팬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과격한 액션 연출과 질풍노도의 전개는 당시 일본 상업 영화계에서 드물었던 요소로서 작품의 평가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소리 소문 없이 출시된 국내판 DVD는 시대착오적인 장면 삭제와 붙박이 자막 등의 뒤떨어지는 퀄리티로 혹평 받았다. 작품을 확인하는데 의의를 둬야 할 정도. (국내 - 뉴스타 디지털 / 해외 - Media Blasters, Inc)
그 외, 국내에서도 <괴시>란 제목으로, 좀비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DVD 발매가 되지 않아 소개를 못함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