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어메이징 그레이스, <인 굿 컴퍼니>의 토퍼 그레이스
2005-09-02
글 : 박은영

카페인을 줄이고, 스킨십을 늘릴 것. 토퍼 그레이스에게 주고 싶은 처방전이다. 시트콤 <70년대 쇼>를 본 여성들이라면, 테스토스테론 과잉으로 보이는 아버지, 장성한 아들을 아기 다루듯 하는 푼수 어머니 사이에서, 안절부절 엉거주춤하던 소년 에릭 포먼을 기억할 것이다. 과연 2차 성징을 거쳤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가녀린 몸매와 목소리를 지닌 그는 또래 사이에서도 유약하고 무력하고 썰렁한 아이로 통한다. 그런데 토퍼 그레이스의 포먼은 그 이상이다. 멍한 눈빛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라고 애달아 하는 것 같은데, 삐딱한 입매는 ‘아무래도 상관없어’라고 냉소를 뱉는 것 같다. 너무 평범해서 배우 같지 않은 얼굴에 담긴 소년의 순수와 고독과 불안. 이런 유형의 배우를 본 적이 있었던가, 더듬어 올라가 보면, 휴 그랜트와 에드워드 노튼이 떠오른다. 아버지뻘의 부하(데니스 퀘이드)와 그의 매력적인 딸(스칼렛 요한슨) 때문에 난감해지는 <인 굿 컴퍼니>의 토퍼 그레이스를 보면, 그런 심증은 더 굳어진다. 미국 언론이 그를 ‘두명의 그랜트’(캐리 그랜트와 휴 그랜트)에 빗대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토퍼 그레이스는 소심한 인상 그대로 조금씩 천천히 경력을 쌓아온 배우다. 처음엔 여자들과 어울릴 기회를 찾다가 학교 극단에 들어갔고, 그렇게 무대에 올랐다가 동급생의 부모가 기획하던 <70년대 쇼>의 주인공으로 발탁됐다. 이 시트콤으로 나란히 스타덤에 오른 애시튼 커처에 비하면 토퍼 그레이스의 행보는 더디고 조용한 편이었다. <브링 잇 온>의 주연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스스로 역부족이라고 판단했고, 비슷한 이유로 18편의 영화를 흘려보내고, 스티븐 소더버그의 <트래픽>에서 마이클 더글러스의 딸을 마약으로 유혹하는 친구 역할로 간소한 신고식을 치렀다. 호화 캐스팅에 가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동정을 바친 것과 다름 없으니까.” 이후 소더버그와의 인연을 <오션스 일레븐> <오션스 트웰브>의 카메오 출연으로 이어왔고, <내 생애 최고의 데이트> <인 굿 컴퍼니> 등에서 포먼과 닮은꼴인 캐릭터들을 체현해왔다. 열등감으로 이지러지고, 그래서 모가 나 있지만, 선하고 순한 본성을 지켜가려고 노력하는 ‘보통 남자’는 이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런 그가 신중히 고른 차기작 <스파이더 맨3>에서는 또 어떤 ‘리얼리티’를 보여주려는지 벌써부터 궁금증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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