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콕’ 집어 어느 한 배우(캐릭터)를 첫사랑의 설레임이나 두근거림으로 좋아해본 기억이 드물다. 물론 좋아하는 배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잭 니콜슨, 존 말코비치, 게리 올드만, 조니 뎁…. 하지만 그들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끌렸고, 그들의 놀라운 변신과 천재적인 연기력을 숭배하는 것이지 연인으로 상상해본 경험은 글쎄, 없는 듯하다.
이리 궁리, 저리 고민하다 보니 문득 떠오른 얼굴. 슬픈 눈빛과 수줍은 미소가 매력적인 랄프 파인즈이다. 눈부신 금발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희고 투명한 피부, 깊이를 알 수 없는 잿빛 눈동자, 그리고 기다란 팔다리가 귀족적인 품위를 느끼게 하는 배우 랄프 파인즈.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서 였다. <쉰들러 리스트>에서 그는 차갑고, 비정하고, 악마적인 마음을 가진 남자 아몬 거트를 연기했었다. 여기서 그는 쉰들러와의 대치점에 선 잔혹한 나치 장교라기보다는 불행한 역사가 낳은 연민의 대상으로, 아름다운 악의 꽃으로 나를 매료했다.
이후, 그가 다시 한번 나를 사로잡은 것은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사막 한가운데서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고 오열하던 모습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경비행기 탐험가로 분해 영국인 귀족 유부녀(크리스틴 토마스 스콧)와 불륜의 사랑에 빠진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격정적으로 교감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챈 남편의 질투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동굴 탐사 길에 사고를 당하면서 심한 부상을 입은 연인을 사막 한가운데 있는 동굴로 옮겨놓고,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겨둔 채 구조 요청을 하러 떠난다. 숨돌릴 틈도 두지 않고, 며칠을 꼬박 새며 사막을 걸어 구원군을 만나지만, 독일인으로 오인한 연합군에 체포되고, 두고 온 연인을 구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도무지 전달되지 않는 간절하고도 외로운 외침. 가까스로 동굴로 돌아오지만, 이미 그의 연인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버린 뒤였다. 그 참담한 상황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애초 그와 사랑에 빠진 자신을 원망할 뿐.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조용히 내 가슴까지 적셨던 것 같다.
사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그 영화를 뚜렷하게 기억하는지, 진짜 재미있게 보았는지 그런 기억은 희미하다. 다만, 그 때의 랄프 파인즈의 슬픈 눈빛과 연인의 죽음 앞에 오열하던 모습만은 지금도 선명하다. 어딘지 이지적이면서 어두워보이는가 하면, 알 수 없는 열정과 잔인함을 동시에 갖고 있는 배우 랠프 파인즈. 흔히 말하는 영웅적인 카리스마보다는, 유창한 언변으로 유혹하기보다는, 차분하고, 조용한 눈빛으로 몇마디 이상의 말을 하는 이 배우에게 나는 끌렸나 보다.
이후로 그가 나온 영화들을 애써 찾아서 보진 않았다.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와 에스에프 대작 영화의 그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듯, 나의 환상이 깨어질 듯한 우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해리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 역에 그가 캐스팅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곤 차가움과 열정을 동시에 가진 랄프 파인즈의 이미지가 잘 어울리는 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게 랄프 파인즈는 <쉰들러 리스트>와 <잉글리쉬 페이션트>가 가장 눈부시게 빛나던, 나를 설레이게 하던 모습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