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토요일 오후, 후끈한 6시였다. 연인들의 주말 데이트가 시작될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뜨거운 애정행각을 참아주기는 싫은 날씨였다. 전도연과 황정민에게 ‘서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남녀’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기자 왈, 애인이 없다는 것 빼고는 일상에 결핍이 없는 도시 남녀들입니다. 서로에게 마음은 있지만 쉽게 표현할 성격들은 아니고, 마음을 줄 듯 말 듯 고민하는 거죠.) 듣자마자 전도연이 낭랑하게 한마디 던진다. “<화양연화>네!” 맞다. <화양연화>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났던 때, (어떤 이들에 한해) 의미를 좁히면 인생에서 단 한번 있을 사랑을 할 때. 박진표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너는 내 운명>도 그런 러브스토리다. 순박한 시골 노총각 석중과 마음에 상처가 많은 다방 레지 은하는 맹세한다. 죽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 시골 흙길을 밟으며 따뜻하고 순수한 사랑을 나눈 두 남녀가 대도시의 차가운 건물 안에서 또 다른 종류의 연인으로 변해가고 있다.
SCENE 1
그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그녀도 따뜻한 사람은 못 된다.
고독은 혼자 즐길 만한 장난감, 외로움은 혼자서 감당키 어려운 장애물이지만
짐짓 부풀어오르는 기대를 두 사람은 버릇처럼 억누른다.
전도연과 황정민은, 어떤 캐릭터를 맡으면 자신들의 원래 얼굴을 지워버린다. 두 사람에겐 ‘원래 어떤 이미지’라는 것이 뚜렷하지 않다. 물처럼 유연한 변화, 도면처럼 정확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배우들이므로 장소, 의상, 스토리의 컨셉을 꼼꼼하게 통일시킨 사진촬영쯤 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현장은 상황 변동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전도연은 곧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몰입하기 시작하는데, 황정민은 보이지 않게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해하는 표정을 드러낸다. 사진기자와 취재기자의 등에도 식은땀이 흐른다. 잔주문이 많이 들어가는 사진촬영 현장은 스트레스를 발생시킨다. 지금 저들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나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를 통과한 이미지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람과 카메라 옆에서 간섭을 멈추지 않는 사람의 의도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프로페셔널리즘은 대신 예상 밖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전도연의 낭만적인 눈빛과 황정민의 ‘불편하오’ 하는 눈빛 사이에 건조한 거리가 생겨난다. 당신이 내 운명일까 따져보는 조심스런 남녀의 외로움처럼. 잔주문이 많이 들어가는 사진촬영 현장은 짜릿하기도 하다.
SCENE 2
그와 그녀는 서로가 제법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걸 알았다.
시가 향과 선홍색 칵테일이 취기를 더한 것일까.
그는 미소를 지어본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 있다.
황정민은 많이 불편해했다. 지금 이 남자는, 여자에 대해 고도의 전략을 가졌으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는 캐릭터가 재수없는 캐릭터잖아요, 그죠?”라고 웃으며 되묻는다. 그는 그런 남자가 맘에 들지 않는 듯하다. <바람난 가족>의 변호사 영작 같은 사람도 “이해가 안 된다”고 했었으니까. 편안한 포즈에 도움이 되라고 가느다란 시가를 건넸다.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황정민의 남자는 딱히 전략을 세우는 것 같지 않다.
전도연은 연인(이 될 사람) 앞에서 꼿꼿한 태도로 일관할 여자가 아니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와 똑같은 빛깔의 칵테일이 놓이자마자 체리를 쏙 뽑아 먹어버린 전도연은 “앞에 있기에 먹으라고 준 줄 알았지”라며 까르르 웃는다. 그는 ‘거리두기’도 하지 않는다. “내가 정민 오빠를 이렇게 스치고 지나갈게요”라며 남자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여자가 되기를 자청한다. 전도연의 여자는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다.
두 사람은 바에 앉아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황정민은 소리없이 웃고, 전도연은 어쩌다 고개까지 젖혀가며 시원하게 웃었다. 인사동에서 희귀한 옛 물건들을 사다 진열해놓았다는 바 안이 아늑해져온다. 석중과 은하가 도시의 부유한 삶을 누리며 살아왔다면, 저런 모습으로 만나 연애를 시작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