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밑이었다. <겨울연가> 주인공 준상의 동상이 춘천에 세워졌다는 뉴스를 접했다(알고 보니 남이섬에도 있다고 한다). 당시 화제의 초점은 그 동상이 실물과 전혀 안 닮았다는 점이었지만, 나는 동상이 된 배우의 심경이 더없이 궁금했고 걱정스러웠다. 배용준이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로 커리어 항로를 영화쪽으로 매끄럽게 선회하자마자 <겨울연가>로 불어닥친 한류 폭풍은 그에게 막대한 힘을 주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배용준을 외딴 성에 칩거하는 괴팍한 왕자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걱정도 팔자다” 내지 “너나 잘하세요”라는 소리를 들어 마땅한 우려였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이 궁금했다는 점이다.
사실 지금부터 쓰려는 것은 남은 이야기다. <씨네21> 517호에 실은 표지이야기는 그날 배용준이 들려준 이야기의 약 1/10에 불과했다. 분명, 한류 이후 배용준은 “이건 거의 알현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 때쯤에야 만날 기회가 오는 상대다. 그러나 그는 일단 약속 장소에 마주 앉으면 둘 중 누가 먼저 만나자고 했나 혼동될 만큼 말하기와 듣기에 집요하게 매달린다. 강직한 젊은 장교의 규율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버릇이 몸에 밴 이 남자는 의례적인 대화마저 충심으로, 진지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자신의 고민을 명제들로 잘게 쪼개고 남의 의견을 구하면서 엉킨 생각을 가다듬는 그는, 고기떼를 뒤쫓지 않는 한가한 날 갯가에 주저앉아 그물을 손보는 어부처럼 보였다. 인터뷰할 때의 배용준은,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만 한편 그것이 안간힘의 결과라는 사실을 누군가 알아차려주길 내심 바라는 것 같았다. 그의 잠긴 목소리는 위로와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예정된 기사의 부피에 넘치는 대화를 이어가며 이상하게도 아무 목적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류의 제왕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캐물을 욕심도, 한 연기자의 온전한 초상을 그려보리라는 염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정리한 그날의 이야기는 어딘가 바람구멍이 뚫린 양 휑하다. 그 바람 소리를 옮긴다.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있나요?
=최근에는 많이 못 읽었어요. 스펜서 존슨의 <선물>이 있네요.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작가죠.
-그건 어떤 위로를 구할 때 읽는 종류의 책 아닌가요?
=예. 옛날에 한번 읽고 이번에 다시 봤어요. 혼란한 상념들이 자꾸 들어서, 나를 다잡고 싶었나봐요. 평소 좋아하는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 파트리크 쥐스킨트, 또 하루키가 추천한 작가 누구더라. 맞다. 레이먼드 카버. 혹시 <숏 컷> 읽었어요?
-영화적인 소설이라고 느꼈어요. 내면 독백을 하지 않고 누가 옆으로 몇 걸음 갔다, 물을 어떻게 따랐다 지문처럼 쓰잖아요. 영화는 어떤 것을 좋아해요?
=옛날 영화는 많이 봤죠. 지금은 코언 형제 좋아해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좋았어요. 왜 웃어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도 그렇고 흑백을 좋아하시는군요. 조원은 조선사회의 근간을 업신여기면서도 그것이 제공하는 빈틈에 기식하는 남자였죠. 범상한 캐릭터가 아니었고 잘 소화했습니다. 과장하면 한국영화 주연급 배우가 한명 늘었다는 느낌이었는데, 마침 한류 신드롬이 일어났습니다. <스캔들…> 직후 계획과 한류 붐 이후 당신의 비전 사이에 차이가 생기지 않았나요?
=저, 바나나 하나 먹고 대답하면 안 될까요?
-(맥이 풀려) 물론 되죠. 제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드실 건가요?
=(사뭇 진지하게) 예, 안 먹을 겁니다. <겨울연가>의 인기로 책임은 커졌지만, 내 위치의 변화는 그리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연기는 어차피 하던 일이었고 무대가 커지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뿐. 일본이라는 나라와 우리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더욱 내게 책임을 지우려는 부분이 있지만, 본분을 넘어서는 일을 하고 싶진 않아요. 그저 질 수 있는 책임에 최선을 다할 뿐이죠.
-세간에는 당신이 ‘부드러운 남자’라서 인기있다는 상식이 있지만, 제가 느끼는 배용준의 이미지는 오히려 약간 가부장적입니다. 파트너로서 따뜻함이라기보다 보호자의 그것이랄까? “사나이는 무한책임을 진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부드러움 같아요. 큰일이 터지면 내가 다 끌어안겠다는 암시가 숨어 있어서, 여자들의 어떤 약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나 싶기도 하고.
=들켜버린 것 같네요. 맞아요. 지금까지는 살아오면서 그냥 짐은 내가 다 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가족은 내가 보살펴야 할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강하고요. 짐을 같이 나눠질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열혈 팬 중에 누군가 다가와 “당신이 나의 이런 빈 곳을 메워준다”고 말한 적이 있나요?
=일본의 가족분들은 <겨울연가>로 인해 옛날로 돌아갈 기회를 얻고 단조로운 생활리듬 속에서 활력을 찾을 것 같아요. 저는 팬을 우리 가족이라고 해요. 일본 진출 전에 국내 팬들도 그렇게 불렀어요. 가족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분들이 나를 오빠, 동생, 친구, 아들처럼 생각하시니까 저도 당연히 그렇죠. <외출>의 콘서트 장면 촬영날 부모님이 처음으로 아들이 일하는 걸 보러 오셨는데, ‘가족’들이 부모님을 알아보시면서도, 난처한 일 없이 지켜주시더군요. 그날 비가 내렸는데 촬영보다 나이 드신 가족분들 건강부터 걱정됐어요.
난 디지털이 싫어요. 배신해요
-사실 <겨울연가>는 유진(최지우)의 드라마라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갈등과 고통과 사랑 이야기라고. 준상은 반면 팬텀 같은 존재였어요. 착시일 수도 있고. 그래서 남자 배우에게는 도전이 약한 역이라고 봤어요.
=동의해요. 윤석호 감독님과는 데뷔를 시켜주신 인연의 의미가 커서 대본도 안 보고 결정했어요. 본격적으로 영화하기 전에 데뷔작 감독님과 다시 드라마를 하면 폐곡선을 맺는 느낌도 들 것 같았고요. 준상과 민형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어느 배우도 모든 감독의 스타일에 맞을 순 없어요. 배우의 준비보다 즉흥성을 요구하는 허진호 감독은 준비에 투철한 당신의 작업방식에 스스로 던진 도전이었죠. 촬영이 끝난 지금, 어차피 안 맞는 방식이었다고 보나요, 연기의 다른 영역을 봤다고 느끼나요?
=후자요. 지금 배운 것은 다음 작품에서 보이겠지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을 무척 좋아하는데, 허진호 감독의 영화와 닮은 것 같아요. 예측할 수 없는 무의식 속에서 나오는 사람의 감정을 붙잡는다는 점에서요.
-후배를 붙들고 술 마시는 신에서는 진짜로 서러웠다고 메이킹 다큐멘터리에서 말했는데요.
=정말 억울하고 서러웠어요. 그런데 저는 눈물을 그냥 못 흘려요. 평소에는 영화 보면서 울죠. 현실에서는 어쩌다 한번… 세수하다가 울어요.
-아, 그런 사람들이 꽤 있군요.
=그럴 때는 세수를 하염없이 하죠. 연기 빼고는 다른 사람 보는 앞에서 눈물 흘린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영화 찍다가 서울에 와서 잠시 병원에 갔거든요.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왜 갑자기 그랬는지. 간호사가 솜으로 슥 닦아주는데 그 닦는 느낌에 계속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그건 어떤 밸브가 고장난 것 같네요. 현장에서 울지는 않았지만 영화 작업과 관계있는 눈물이 차 있다가 갑자기 새어나온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배우로서 괴어 있던 눈물일까요? 캐릭터로서 괴어 있던 눈물일까요?
=분석은 안 해봤어요. 인물의 상황도 작업 방식도 힘들었으니까.
-지금까지 <외출>의 인수와 똑같진 않아도, “내가 너무 순진했어”라고 깨닫는 배신감을 겪어보셨겠죠? 만약 있었다면 사랑에 관련된 배신감이었나요?
=(잠시 생각하다) 아무리 보여줘야 될 의무를 가진 직업이지만 그런 걸 말하고 싶겠어요? 아무튼 제가 알고 있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나의 기억을 상기하며 연기하지는 않았어요.
-배용준씨는 고정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가까이 들어가는 정면 숏보다 멀리서 바라보거나 어깨를 걸고 뒤나 옆에서 보는 숏들이 저는 더 편해요. 본인 견해는 어떤가요?
=나도 가까운 숏이 불편해요. 성격적인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표정을 지을지 고민돼서가 아니고 화면에 내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해요. (웃음)
-혹시 카메라 뒤에 있는 쪽이 더 편하지 않나요?
=맞아요. 많은 사람 앞에서 연기를 하도록 타고난 것 같지는 않아요. 소심하지는 않지만, 뒤풀이 가서 노래하고 춤추고 이런 건 못하거든요. (보이스 레코더를 확인하는 기자를 보다 문득) 난 디지털이 싫어요. 테이프 돌아가는 기계가 안심되지 않아요?
-예. 영화제 가서 8일간 기자회견한 녹음을 날린 적이 있어요. 다행히 수첩 메모를 겸한 덕에 살았죠. 당신도 <외출>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 파일을 날렸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아, 죽어버리는 줄 알았어요. <스캔들…> 때는 필름 작업을 하다 시간에 쫓겨서 디지털카메라를 구입했는데 3/4 정도 날렸어요. 복구하기가 엄청나게 어렵더라고요. 난 디지털이 싫어요. 배신해요.
늘 터닝 포인트라는 느낌으로 살아요
-사진집을 위한 보디빌딩 과정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으면서, 당신은 ‘나’라는 존재를 의지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담배를 끊는 것도 자유자재라면서요.
=끊을 수 있어요. 나는 목표가 있으면 움직여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보디빌딩 직후의 몸은 절대 유지 못해요. 하루에 운동량이 5시간이고 나머지 시간은 움직이지 않아야 해요. 인간의 의지문제에 관해서는 얼마 전 논쟁도 했어요. 상대는 타고난 환경과 요소는 바꿀 수 없다고 했고 나는 자기가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달렸다, 나는 긍정적 시각으로 삶을 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죠.
-그건 크게 깨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로 들리지 않을까요?
=나도 내 삶이 부서졌다고 느낀 적이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지나고 나면 힘들었다는 기억만 있고 잘 떠오르지가 않아요. 나는 하나라도 뭔가 배우든 베풀든 했으면 그날은 기뻐요. 그러나 아무것도 한 게 없고 무의미한 날은 불행해요. 물론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을 스스로에게 선물할 때도 있지만. 늘 터닝 포인트라는 느낌으로 살아요. 어렸을 때부터 나를 움직이게 하는 자극이 필요했고 그게 없으면 무기력해져요.
-이른바 잡기(雜技)에도 능할 것 같습니다.
=예. 포커도 잘하고 게임 자체를 워낙 잘해요. 다음 수를 빨리 읽는 편이죠.
-이를테면 “나는 배우를 하기에는 너무 생각이 많다”고 느낀 적 없나요? 왜 꼭 연기여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요? 처음에는 학비를 위해 연기를 시작했다는 말도 있었고 합동영화사 연출부, 제작부 생활도 거친 걸로 압니다.
=성격상 성취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운동선수가 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할 때도 있어요. 배우는 발전을 정확히 확인하기 힘드니까.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은 책임감도 있고, 배우 배용준은 자연인 배용준이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어서겠죠. 예컨대 희망이나 활력소가 되는. 그리고 지금은 연기를 잘해보고 싶어요. 정말 잘해내고 싶어요.
-<외출> 대사 중에 잠잘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말이 있죠. 본인은 어떻습니까. 역시 힘든 일에 도전해서 성공할 때 더 행복한가요?
=그것을 위해서 자는 거니까요. 전 바쁘게 움직이고 잠잘 때는 기절해요. 절대 안 깨고 다섯 시간 정도 숙면해요. 잠으로도 모든 걸 놓아버릴 수 없을 때도 물론 있지만요. (불쑥)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당황해서) 글쎄요. 살면서 내 생각과 행동이 어디까지 고유한 내 것이고 어디부터 주입되거나 흉내낸 것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그런데 사랑만은 그런 괴리감 없는, 고유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요새 사람들 만나면 계속 이렇게 물어보고 다녀요.
-새끼손가락의 그 반지는 극중 인수 물건인 줄 알았는데, 배용준씨 반지인가 봐요?
=내 것이에요. 어쩌다 빼놓고 나오면 허전해서 집에 다시 돌아가곤 하죠. 이 반지를 끼고 있으면 누군가의 손이 내 손가락을 잡아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현장에서 동료들과 다정한 스킨십을 많이 하던데요. 사람들이 자기를 불편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어서 일부러 그러나요?
=그런 생각 안 했는데, 몇번인가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면 가까이 오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뭔가 단단한 느낌이 있다고. 내가 그런가요?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고 거꾸로 말하자면… 하지만 이런 얘기는 결례인 것 같네요.
=무슨 얘기할지 알겠어요. 누가 내 얼굴이 변했다고 하던데요. 옛날엔 고집스런 부분이 강해 보였는데 지금은 그것이 깎여나간 것 같다고요.
-그래도 입매가 권력자형이에요. 그래서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왕 담덕으로 분한다고 했을 때, 당신의 입을 생각했어요. 늘 웃고 있지만 다른 사람 의견을 다 들은 다음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갈 것 같은 입이거든요. <태왕사신기> 촬영은 10월에 시작한다고요?
=후속작을 미리 결정한 것도 저로서는 새로운 일이었어요. 늘 마지막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연기했거든요. 이유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태왕사신기>는 6개월 정도 사전제작으로 찍어요. 김종학 감독님과도 일해보고 싶었고요. 담덕은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는 엉뚱한 캐릭터예요. 능청스럽지만 정복자, 지배자의 운을 타고난 인간이죠. 젊어서 세상을 거지꼴로 돌아다니는데, 곁을 따르는 이들이 “저 사람이 왕이 될 사람이야”라고 말하죠.
-계속 강한 캐릭터가 이어지는군요. 어떻게 보면 <겨울연가>가 예외적이었어요. <호텔리어>도 그렇고,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는 <스캔들…>의 조원과 성격이 연결되고요. 앞으로도 강인함의 다양한 색깔을 더 고민해야겠군요.
=그러고보니 다 강한 인물이었네요.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저도 좋아하는 드라마예요. 아마 지금까지 찍은 것 중에서 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