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할리우드 영화 속 한국인, 한국 배우들
2005-09-09
글 : 김송호 (익스트림무비 스탭)
글 : 한청남

9월 22일, 미국의 뉴 라인 시네마에서 제작한 코미디 영화 <해롤드와 쿠마>가 국내 개봉된다. 두 명의 청년이 화이트 캐슬 식당의 햄버거를 먹기 위해 온갖 소동을 거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전형적인 코믹 로드무비지만,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조금 특별히 다가오는 점이 있다.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 해롤드 역에 한국계 배우 존 조가 출연한다는 것. 메이저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에 한국계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것은 거의 전례가 없었던 일로, 할리우드에서도 그 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아시아계 미국인 관객층을 의식하기 시작한 동시에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한 한국계 배우들의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윤진이 출연한 TV 시리즈 <로스트>

특히 한국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웃 나라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해 왔다. 한국인 배우들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연기하기도 했고, 설사 한국인으로 등장했다고 해도 시시한 배역으로 관객들의 인상에 거의 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점차 국제사회, 특히 미국 내에서 한국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새로운 관객층을 찾으려는 할리우드 영화계의 노력 덕택에 최근에는 한국인 또는 한국계 배우들의 모습을 좀 더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삼나무에 내리는 눈> <007 어나더데이>의 릭 윤, <아나콘다 2>의 칼 윤, <매트릭스 2>의 랜덜 덕 김, TV 시리즈 <로스트>의 김윤진과 다니엘 대 김 등이 그 좋은 예. 여기에 아시아권의 한류 열풍의 영향으로 홍콩, 중국, 일본 등지에서 제작된 여러 편의 작품에서 한국계 배우가 등장하거나 한국, 한국인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DVD 토픽에서는 <해롤드와 쿠마>의 공개를 맞아 한국 또는 한국인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통해 그 동안 해외에서의 한국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스폰> 새로운 악의 축, 북한

<스폰>은 초법적 비밀 임무만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특수부대원 앨 시몬스가 조직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가 지옥의 군대를 이끌 전사로 부활한다는 내용을 다룬 작품이다. 무도가이자 배우인 마이클 제이 화이트가 열연한 시몬스는 조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임무로 적국의 화학공장을 폭파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문제는 그곳에서 묘사되는 적국이 다름 아닌 북한이라는 점이다.

북한은 90년대 이후 냉전이 종식되자 할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적국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최근에는 <패시파이어>나 <스텔스>에 이르고 있다. 그 전까지 수많은 밀리터리 영화나 액션 영화에서 미국의 악의 축이었던 구소련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설정된 새로운 악의 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작인 <스폰>에서는 그 전까지는 철자가 틀리거나 폰트가 어색하곤 했던 한글 표기가 의외로 잘 되어 있으며, 한국어도 비교적 정확한 편이다. 그러나 시몬스가 목을 비틀어 죽이는 북한 병사의 모습은 할리우드에서 바라보는 북한이라는 것이 결국 예전의 ‘빨갱이 놈들’의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다. (씨넥서스 발매)

<007 어나더 데이> 북한군 장교의 놀라운 변신

외국 관객들이야 한편의 화끈한 007 영화로 생각했겠지만 개봉 당시 국내 관객들 사이에서는 애증의 영화로 받아들여졌던 작품이다. 북한군 장교 ‘자오’ 역으로 007과 맞짱을 떴던 릭 윤은 졸지에 비애국자 신세가 되었고 엽기적인 변신을 하는 문대령, 창천1동대의 활약 등 한국인 입장에서는 황당한 설정들이 비웃음을 샀다. 요즘 할리우드 영화들이 한국 관련 고증에 신경을 쓰는 이유가 이 영화의 한국 시장 흥행참패 때문이 아닌가 싶을 정도.

사실 말도 안 되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문대령은 그야말로 글로벌한 스케일의 악당으로서 제임스 본드 이상의 멋진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다이아몬드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갑부인 그는 세계의 기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공위성을 제대로만 굴렸어도 존경받는 위인이 되지 않았을까. 고작 ‘아부지’한테 인정받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남침 계획만 세우지 않았어도 말이다. 그런데 가끔은 문대령 역의 캐스팅을 거절한 차인표가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최소한 제대로 된 우리말 발음으로 007 역사에 남을 악역을 연기했을지도 모르는데…. (20세기 폭스 발매)

<패시파이어> 어떻게 빈 디젤보다 한국말을 못해?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이 영화를 보며 황당함을 느낄 것이다. 액션스타 빈 디젤이 애보기에 나섰다는 이유 말고도 영화 중간에 나오는 한국인 부부들 때문이다. 빈 디젤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본 그들의 대화를 들리는 대로 옮겨보자. “미친게 뜨가따 한산 시끄러꼬 / 어떠께좀 해바” 이에 질세라 빈 디젤이 대꾸한다. “죄쏜함니다 / 도뚜기 드럿섯어여”

단언컨대 지금까지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본 최악의 한국어 발음이라 할 수 있다. (주한미군 출신?) 특수부대원 역할을 맡은 빈 디젤보다도 한국인으로 나오는 배우들 발음이 더 알아듣기 힘든 것이 압권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들 부부가 빈 디젤의 한국말을 듣기 싫다며 영어로 말하자고 하는 부분이다. 누가 누구를 나무라는 것인지 원. 아무리 봐도 수상한 이웃인데,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정체는 미국의 첨단 무기 기술을 훔치려는 북한 스파이들이다. 아무리 코미디 영화라지만 이쯤 되면 무신경하게 영화를 찍는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진짜 개그맨처럼 여겨진다. (브에나비스타 발매)

<레모> 한국 사람이라고 하긴 하는데 말이야...

워렌 머피와 리차드 새피어의 펄프 소설 ‘디스트로이어’ 연작을 영화화한 <레모>는 1985년이라는 제작시기를 감안하면 의외로 한국인 캐릭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바로 주인공 레모 윌리엄스(프레드 워드 분)에게 무술 ‘신안주’를 전수하는 스승이 한국인이라는 설정 때문이다. 발음에 따라 ‘전’ 또는 ‘천’이라고 불리는(크레딧에는 ‘Chiun’으로 표기) 이 무술의 대가는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 근육과 뼈의 움직임을 듣고 총알을 피하거나 물 위를 달리는 등 신기에 가까운 활약을 보여준다. 게다가 크레이그 새펀이 작곡한 음악에는 한국의 전통 악기와 국악을 연상시키는 멜로디가 사용되기까지 했다. 전 또는 천 노인의 꼬장꼬장한 성격과 제자 레모를 호되게 가르치는 모습도 왠지 ‘한국적’이다.

그러나 칭찬은 여기까지. 전 또는 천 노인의 복장이나 그가 사용하는 식기, 음식 등의 고증은 중국식인지 일본식인지 한국식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다. 더욱이 그를 연기한 배우도 조엘 그레이라는 미국인이다. 공개 당시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보면 오리엔탈리즘 묘사의 또 하나의 예로서 비웃음을 살 만하다. <Remo Williams : The Adventure Begins>라는 원제가 무색하게 단발 이벤트로 끝났기에 망정이지, 시리즈가 계속되었더라면 우리는 80년대 내내 왜곡된 한국인의 묘사를 참아내야 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혹시 모르지. 한국에 대한 인식이 점차 나아지면서 고증이 정확해졌을지도. (스펙트럼 발매)

<똑바로 살아라> 볼수록 안타까운 그들의 삶

스파이크 리 감독의 출세작 <똑바로 살아라>. 미국 뉴욕의 할렘을 배경으로 흑인과 이탈리아인 사이의 갈등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흑인들이 이탈리아인 ‘살’의 음식점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폭동 장면인데, 1992년의 로스앤젤레스 폭동을 예견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지역답게 한국인 부부의 가게도 등장하는데, 극중에서는 구두쇠에 융통성 없고 불친절하며 영어도 잘 못하는, 한 마디로 미국에서 흑인들이 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을 그대로 대변하는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다.

전술한 클라이맥스에서 분노한 흑인들은 살의 음식점을 박살낸 뒤 한국인 부부의 가게로 향하는데, 그들 중 남편은 밀대를 휘두르며 ‘나 백인 아냐! 나 흑인이야! 니네랑 똑같아!’ 라며 어눌한 영어로 가게 앞을 막아선다. 이 애처롭기 짝이 없는 장면에서는 이국에서 고생하며 터전을 일구어 온 수 많은 교포들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결국 흑인들은 ‘한국 사람은 놔두라’며 가게를 두고 가는데, 한 마디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지나가는 역할이었기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는 한국인의 극중 비중이 작았기 때문에 피해가 없었지만, 불과 몇 년 뒤인 1992년에는 한국인들도 무참한 피해를 입었다. 영화는 영화. 현실은 현실. (유니버설 발매)

<딥라이징> 멋진 모습을 기대했건만

아마도 중국인 혹은 일본인이겠거니 싶은 캐릭터가 불현듯 한국말을 할 때, 자연스러움보다는 놀라운 감정이 드는 것은 아직도 할리우드에서 코리아의 위상이 그리 높지 못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다이하드', '에이리언', '타이타닉'을 섞어놓은 잡탕 액션 영화 <딥라이징>에 등장하는 레일라가 바로 그런 놀라움을 선사한 캐릭터. 그녀는 시작부터 “X팔 얼어죽겠어”라는 리얼한 욕을 구사해 보는 이를 잠시 패닉 상태로 몰아넣는다. 아쉬운 것은 괴짜 정비사 팬투치의 애인이라는 점 외에 큰 비중이 없는 인물이라는 점. 화끈한 모습으로 등장하였으나 나중에 바다괴물에 의해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는 비운의 캐릭터다.

레일라 역을 맡은 이는 우리나라 출신의 우나 데이먼이라는 배우인데(IMDB 참조), <딥임팩트> <스파이더맨> 같은 블록버스터에도 간간히 모습을 비춘 바 있다. 앞으로 더욱 멋진 활약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브에나 비스타 발매)

<매트릭스 2 리로디드> 키메이커는 어느 나라 프로그램?

<매트릭스 리로디드> 개봉 당시 삼성 휴대폰의 채용과 함께 화제를 모았던 것은 극 중 ‘키메이커’로 등장했던 랜덜 덕 김이 한국계 배우라는 점이었다. 네오의 운명을 쥔 중요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동네 열쇠가게 아저씨 같은 그를 캐스팅한 워쇼스키 형제의 안목도 놀랍지만, 온통 선글라스에 무게만 잡는 모피어스 일당들 틈바구니에서 나름의 존재감을 피력한 본인의 연기력 또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비록 사람이 아닌 디지털 신호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에 불과하지만 마지막으로 퇴장하는 장면에서는 묘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를 한국인 캐릭터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선 그는 프로그램이고 매트릭스의 배경 자체가 기계들에 의해 국가나 민족이 사라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 로고가 분명히 찍힌 휴대폰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가상의 한국도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키메이커는 기술한국이 만든 첨단의 프로그램일 수도 있다. (워너 브라더스 발매)

애니에도 한류 바람
일본 애니메이션에 표현된 한국, 한국인

<카우보이 비밥> 중에서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속에도 한국인 캐릭터와 한국말이 등장할 때가 있다. 일본에서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낮았던 90년대 이전까지는 극히 비중이 없는 조역이거나 혹은 악역으로 등장하곤 했는데, 국내에서는 ‘도전자 허리케인’로 소개된 <내일의 죠>의 김용비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김용비는 당시 세계 복싱계에서 한국이 두각을 나타내던 시절이어서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 한국인 복서지만 일본인 죠에게 무참히 패하는, 우리가 보기에 다소 껄끄러운 캐릭터로 나온다.

한류붐이 휩쓸고 있는 요즘에는 <카우보이 비밥>이나 <이노센스> 같은 작품에 우리말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으며, <고스트 바둑왕>에서는 일본인 주인공을 능가하는 실력의 바둑 선수가 한국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특히 <후르츠 바스켓>으로 유명한 다이치 아키타로 감독은 한국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품들에 한글이나 한국말을 삽입하기로 유명하다. 앞으로는 <신 암행어사> 같은 합작 애니메이션에서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업 애니메이션에도 한국인 캐릭터가 긍정적으로 다뤄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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