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마디 굵은 나무, <박수칠 때 떠나라>의 유승룡
2005-09-12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이혜정

<박수칠 때 떠나라>는 무수히 많은 배우들이 출연하여 한순간만은 주연의 몫을 해내는 영화다. 살해당한 여인의 마지막을 목격한 안마사 황정민, 무정한 얼굴로 증오를 토로하는 용의자 박정아, 귀신이 들려 사지를 뒤트는 PD 임승대, 잠깐이지만 영화의 한장(章)을 휘어잡고 떠나는 마약상 정재영. 그러나 유승룡은 달랐다. 최연기(차승원)의 동료검사 성준으로 출연한 그는 온전한 자기만의 장면이 없으나 뚜렷한 인상으로 영화를 도왔고, 낮은 목소리와 유들거리는 말투는 타고난 듯 자연스러웠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는 어디에서 나타났을까. 장진 감독은 서울예대 1년 후배인 그를 두고 “내 영화에서 그 정도 배역을 맡았으면 나와 2년 정도는 호흡을 맞췄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비공식적이면서 매우 길었던 일종의 오디션을 암시했다. 그 말대로다. 연극 <웰컴 투 동막골>로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장진 감독이 연출한 환경영화 <소나기는 그쳤나요?>와 인권영화 <고마운 사람>으로 이어졌고, 단역이었던 <아는 여자>의 은행강도 두목을 거쳐, <박수칠 때 떠나라>로 세상에 나왔다.

어쩌면 조금 일찍 시작될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유승룡은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일년에 몇편은 좋은 공연을 보여주신 부모님 덕분에” 중학교 3학년 때 김진태(그는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TV 쇼를 기획한 방송사 간부 역을 맡았다) 주연의 연극 <파우스트>를 보았고, 그 파장에 흔들려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뮤지컬과 전위극, 정극에 두루 관심을 가졌던 그는 함께 공연했던 장진 감독이 수줍게 내민 쪽지 비슷한 대본을 거절하고 전위극에 출연했는데, 거절한 연극이 <허탕>이었다. “장진 감독이 조금 삐쳤던 것도 같아요. (웃음) 그 때문에 정재영이나 임원희 같은 동기들보다 늦게 출발한 셈이 됐지만 하고 싶었던 걸 다 해봤으니까 후회하진 않아요.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건지….” 그러나 그 반대로도 들렸다. 그는 얼마 전에야 장마철이면 불안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반지하방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무대에만 머물렀던 배우들이 흔히 겪은 고생담을 또박또박 들려주면서도, 그는 맺힌 데가 없어 보였다. “차승원씨가 나하고 동갑인데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이잖아요. 놀려요. 아이도 6개월 됐지, 영화도 이제 시작했지.” (웃음)

유승룡이 5년 동안 <난타>에만 매달렸던 것도 그 욕심과 무욕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기질 탓이었다. “브로드웨이에 가고 싶었거든요. <난타>는 국가대표급 공연이잖아요. 영화배우가 할리우드에 가고 싶어하는 거하고 비슷한 욕심이죠. 그것만 하느라고 대사를 한줄도 못해서 벙어리가 될 것 같아 그만두기는 했지만.” 간간이 만나곤 했던 장진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웰컴 투 동막골>에 출연한 유승룡은 아직도 본래 가지고 있던 언어 감각의 70% 정도만 되찾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럼에도 내지르지 않고 곰곰이 되씹은 다음에 감정을 꺼내놓는 것 같은 그의 연기는 눈에 띄었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된 <고마운 사람>은 천천히 성장하여 마디 굵은 나무가 된 듯한 그를 <박수칠 때 떠나라>보다 한발 앞서 보여준 영화였다. 이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인물은 계약직 고문기술자. 좁은 취조실 안에 대학생과 단둘이 갇힌 그는 철야고문 근무를 해도 제대로 된 야근수당을 받지 못하는, 피로감이 배어나오는 중년 노동자였다. “주연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고생도 많이 했고. 12월에 공사(영화 촬영시 신체의 중요한 부분을 가리는 배려)도 안 하고 시멘트 욕조에서 찬물로 목욕을 했으니까요.” 유승룡은 그보다 앞서 찍었던 <소나기는 그쳤나요?>에서도 느린 전라도 사투리와 처진 뱃살을 가진, 갈데없는 시골 농부로 등장해, 첫사랑에 빠진 아들을 한심해하면서도 보듬어주는 믿음직한 연기를 해냈다.

광기와 사자후만이 튀어오르는 요즈음 보기 힘든 미덕이다. 그러나 유승룡은 그 공을 장진 감독에게 돌렸다. “연극을 하다가 영화에 출연하면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기가 어려운데 장진 감독이 많이 눌러줬죠. 소리지르고 미치고 그런 건 언제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밋밋하게 가는 게 제일 어렵죠. <박수칠 때 떠나라>는 연출의 몫이 컸던 것 같아요.” 서두르지 않고 길을 고르고 있는 유승룡은 장진 감독이 연출하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연습 중이다. 뒤늦게 영화를 시작한 탓에 새삼스럽게 조연이자 무명배우로서의 설움도 겪었지만, 목소리처럼 낮게 가라앉은 웃음으로 나쁜 말을 삼키면서, 그는 말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데이비드 핫셀호프가 출연한 뮤지컬 <지킬 앤드 하이드>를 보고 너무 좋았는데,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서, 이것저것 다 해봤나봐요.” 언젠가 서울예대의 한 교수가 너는 늦게 피는 배우이니 그 순간까지 연기만 열심히 하라고 했다 한다. 그래서 열심히 했으니, 지금이 그 순간이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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