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외출>의 허진호 감독과 소설 『외출』의 김형경(44) 작가 만났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두 작품은 제목뿐 아니라 인물도 공간도 상황도 공유한다. 그러나 같은 인물, 같은 설정이라도 두 작가에 의해 각각 만들어진 인물과 이야기는 다른 질감을 지닌다. 허 감독의 <외출>에서 상처받고 금지되는 사랑을 바라보는 두 개의 상반된 시선이 충돌한다면 김 작가의 『외출』에는 이제 막 시작되는 사랑의 풋풋한 생명력이 감지된다. 9일 비 오는 오후, 지난 겨울 삼척 촬영현장에서 인사를 나눈 이후 두번째 만난 두 사람은 영화 <외출>과 소설 『외출』, 그리고 영화와 소설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김형경(이하 김)=영화계에서 <외출>의 소설 작업에 대해 어떻게 얘기할 지 궁금해요. 문단에서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전례가 없던 일이니까.
허진호(이하 허)=소설 『외출』을 읽으니까 소설과 영화는 전혀 다른 매체라는 게 뚜렷이 보였어요. 소설적인 표현방법을 영화에 차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죠. 내 영화에는 불친절한 부분들, 즉 생략된 디테일들이 소설에는 치밀하게 묘사돼 있잖아요. 예를 들어 영화에서도 부분적으로 소설처럼 나레이션이 나오거나 자막이 들어갈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 거죠.
김=나도 비슷한 걸 알게 됐어요. 영화에서 인수의 아내가 깨어났을 때 서영이 밖에서 작은 사각의 창문으로 병실 안 인수의 뒷모습을 보는 장면이 등장하잖아요. 영화는 이 한 장면으로 서영이 느끼는 단절감를 선명하게 드러내주죠. 이처럼 영화가 하나의 장면으로 심장 깊은 곳에 꽂는 이미지의 충격은 언어 백 마디로도 따라갈 수 없는데, 반면 언어의 심리라고 할까, 등장인물들의 미세한 심리적 변화들은 영상으로 전부 표현되기 힘들죠.
허=글이 가지는 어떤 깊이랄까, 영화가 시간상의 제약같은 이유로 설명해주지 못하거나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부분에서 소설과 어떤 접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소설 덕분에 영화의 표현방식에 대한 많은 공부가 되고 있어요. 그래서 더 재미있게 읽었어요.
김=저도 영화 잘 봤습니다(웃음). 허 감독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는데, 전작들을 포함해 왜 모든 영화에 엄마가 없는가예요. 또 어머니가 없는 대신 남자주인공이 부엌에 서 있는 장면이 늘 나오는데요(<외출>에서는 편집에서 삭제됐음-편집자), 우리나라의 보통 남자들이 생각하지 않는 장면이죠. 그런 점에서 보면 여느 남자 주인공 영화에서 여자는 피사체같은 존재인데 비해 허 감독은 여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허=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 건 우연인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는 정말 좋으신 분이고(웃음), 어떻게 보면 <봄날은 간다> 이야기가 어머니에서 시작됐거든요. 어머니가 노래방에 가면 그 노래만 부르는 데 환갑잔치 때 부르시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동네 아주머니들하고 고스톱 치는 것도 좋아하시고(웃음). <봄날은 간다>를 촬영할 때, 이영애씨가 감독님이 은수였군요, 상우 입장인 줄 알았더니,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있어요.
김=확실히 가부장제가 주입하는 남성상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요. 감독님 페미니스트인가요?
허=여자를 좋아하는데(웃음), 페미니스트인지는 모르겠는데요.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인물들에게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게 느껴졌어요. 반면 영화에서는 두 가지 시선이 있었던 것 같아요. 따뜻하게, 예쁘게 보이려는 것과 추하게 보이려는 시선.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가 여기서 나는 것같아요. 이를테면 두 사람이 호텔에 들어가기까지 손을 잡거나 뽀뽀하는 과정을 다 찍었는데 편집에서 뺐어요. 보는 이들의 이해를 구하는 절차를 밟기 싫었거든요.
김=불륜이라는 자의식이 있었던 건가요?
허=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두 가지 시선에 대한 것이었어요. 정말 아름다운데 왜 추할까 하는. 이를테면 둘이 자러 들어갈 때는 추한데 같이 잘 때는 너무 예쁘잖아요. 디카에서 목격한 배우자의 불륜장면은 비린내가 났지만 그들도 잘 때는 이렇지 않았을까. 이런 대비들. 마지막 장면에서 둘이 만나지만 차마 모습을 안보였던 것도 두 가지 생각이 부닥쳐서였어요. 다시 만나서 기쁘지만 둘은 기억 때문에 행복할 것같지 않았거든요.
김=나는 불륜이라는 생각을 아예 지우고 썼어요. 또 하나의 사랑이라는 시선에서. 불륜은 제도가 만들어 놓은 거기 때문에 그들의 내면에 들어가서 동기만 순수하게 보면 된다, 제도나 조건은 중요치 않다, 다만 절박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랑을 한다는 그런 느낌으로 썼어요. 중간중간에 ‘그들(서로의 배우자들)도 그랬을까’라는 생각 정도만 했던 거죠.
‘추하지만 예쁜것’ 그 간격 얘기하고 싶어
허=그런 따뜻함이 나도 참 좋은데 왜 이렇게 차가워졌는지는 모르겠어요. 특히 경호가 죽기 직전에 연락을 받는 화면처리는 감독이 마치 단죄하듯 만든 의도성이 보이거든요. 그 공간에서 고스톱 치는 것이 자연스럽긴 하지만 그 장면에서 재미만이 아니라 냉정하게, 잔인하게 보고 싶었던 부분이 있어요.
김=<8월의 크리스마스>가 사춘기적인 사랑이라면 <봄날은 간다>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 20대의 사랑이었고, <외출>은 30대 초반의 기혼이라는 설정이 조금 더 진도 나간 걸로 볼 수도 있을 것같아요. 허 감독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전보다 더 많이 보여주는 느낌이었어요.
허=얼마 전에 일본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 리메이크작을 보내왔어요. 에피소드나 이야기 흐름이 원작과 거의 비슷한데 지금 보니 착한 영화더라고요. 그 작품을 할 때도 나이가 꽤 있었는데 당시의 시선과 지금 시선의 격차가 굉장히 커서 내 영화를 보는 느낌이 아니었어요. 지금에 비하면 그때의 시선이 지닌 온도가 훨씬 높았다고 할까요. 이 영화를 보면서 ‘만약 거꾸로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선이 차가워지면 깊이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행복한 일은 아닌 것같아요.
김=나는 반대인 것같아요. 오히려 옛날에는 냉소적으로 사람을 봤는데 나이 들면서 편해지고 웬만한 건 이해가 됐죠. 이번 소설에서도 난 두 사람이 그럴 수 있다고 봐요. 그런 닫힌 공간에서 배우자에게 그런 일 당하고 나면 얼마든지 사랑을 할 수 있겠다는 이해가 있었어요. 허 감독도 조금 더 살아보시면 바뀔 겁니다.(웃음) 반면 소설로 풀어가는데 가장 큰 도전이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사랑을 하는 게 가능할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상처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였죠.
허=복수심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난 두 사람이 사랑해서 잤다는 생각을 안했어요. 두 사람이 호텔에 가기 전까지의 과정 찍은 걸 다 들어냈던 데는 그런 의도가 있었어요. 횟집에서 둘이 술 마시다가 인수가 복수할 거야 그러잖아요. 둘에게 그런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것같아요. 사실 둘이 자는 시점도 더 앞으로 당기고 싶었는데 놓쳤어요. 반면 둘이 사랑을 느끼는 감정묘사는 전작들에서 해봤던 게 있어선지 그닥 관심이 가지 않았죠.
김=옛날에 했던 얘기니까 여기서는 생략하고, 그냥 자자? (웃음)
허=편집기사가 그러더라구요. 아니 도대체 유부남 유부녀가 왜 이렇게 빨리 안 자는거야?(웃음)
김=영화에서는 많이 생략된 두 사람의 감정-사랑이 시작될 때의-을 소설에서는 자세히 쓴 것처럼 이번 작업은 일종의 빈칸 채우기같은 즐거움이 있었죠. 시나리오나 영화는 불친절한데 그 빈 곳들을 채우는 적합한 이야기가 떠오를 때 느끼는 희열이 있었어요.
허=소설에서 서영이 ‘냉장고에 물 있습니다’라고 메모를 써놓은 부분을 보면서 아쉬워서 무릎을 쳤어요. 만약 영화를 만들기 전에 소설을 읽었다면 영화에서 그 부분을 분명히 표현했을 것같아요. 나는 왜 그런 것들을 생각 못하고 어떻게 하면 둘이 빨리 자게 만드는 방법이 있을까만 고민했을까?(웃음)
김=다음 작품은 구상하셨나요? 어떤 사랑의 이야기가 될지.
허=아직 정확하게 결정은 안했는데, 좀 더 온도를 낮추든지 아니면 높이든지 해야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이게 무슨 얘기지?(웃음) 어쨌든 이번에는 좀 빨리 만들고 싶어요. 사실 만드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 안걸리는 데 어떤 이야기할까 결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새 작품은 얼마나 많이 쓰고 계세요?
김=저는 꾸준히 써요. 한동안 공백도 있었지만 최근 몇 년은 일년에 한편씩 꼭 썼어요. <외출> 의뢰받을 때도 다른 작품에 들어가 있던 상태였고.
허=아침에 일찍 일어나시죠? 영화가 생활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는데 그게 잘 안돼요. 직장생활 같지야 않겠지만 몇 시간 찍고 가정으로 돌아가고 그런 분리가 안돼요. 만드는 것 자체도 힘들고. 행복해지는데 불편한 점이 있어요.
김=저 어마어마한 단어(행복)를 일상적으로 쓰시다니(웃음). 우린 꿈도 안 꾸는데.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하죠. 일상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
허=영화 스태프들과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요. 영화 촬영 기간이 고되니까 끝나면 행복해지겠지 하는데 막상 끝나고 나면 차라리 찍을 때가 낫다.
김=소설 쓸 때는 다음 생에 태어나면 이 골 빠지는 짓 안 해야지 하다가도, 끝나고 나면 마음 바뀌는 것과 비슷하네요.
시나리오가 어떻게 소설로 ‘외출’ 했나
영화의 마케팅 상품이 아닌 ‘본격소설’『외출』을 처음 구상한 사람은 영화 <외출>의 음악을 만든 조성우 음악감독. 허진호 감독과 대학동기이면서 친한 친구인 조 감독은 <외출>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의견을 감독에게 전했다. 감독이 흔쾌히 동의하자 조 감독은 친구인 문학과지성사의 김수영 주간과 상의를 했다. 두 사람은 이 작업이 논쟁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작품만 좋다면 아무도 시비붙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작가 섭외를 했다.
“새로운 형식실험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시나리오에 대한 호감으로 이 작업을 수락했다”고 작가 김형경씨는 말했다. 2월 말 시나리오를 받은 김씨는 7월 말 소설을 완성할 때까지 촬영현장인 삼척에 한번 갔던 것 말고는 일부러 감독과 연락을 하지 않았다.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의견을 들으면 내 상상력에 제한을 받을 것같아서”였다고. 대신 김씨는 편집되지 않은 촬영분 필름을 네 차례에 걸쳐서 검토했고 그래서 소설에는 인수가 시장을 봐오는 장면 등 영화에서 잘려나간 부분이 일부 복원돼 있기도 하다.